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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전설(88회) • 평북 삭주의 만세시위 89 3월 31일 이후 외남면 대관 시위의 대규모화 외남면 대관(大館)에서 3월 17일 최초 만세시위 이후 2주 동안 잠잠한 듯 했다. 그러나 3월 31일부 터 다시 시위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3월 31일 에는 천도교인 20명이 만세시위를 벌였다. 12명이 검거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 을 감지한 도장관은 선천수비대에 파병을 요청하였 다. 선천수비대장은 “구성군 신시(新市)에 출동시켰 던 병력을 대관으로 보내겠다”고 회신하였다. 4월 1일은 대관 장날이었다. 천도교인이 주도하 는 약 500명의 시위대가 대관시장에서 조선독립만 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이날 평화적인 만세시 위를 벌였음에도 일제는 19명을 검거했다. 4월 2일 천도교인들은 다시 외남면 소재지인 대안 동(大安洞)에서 더 큰 규모로 시위를 벌였다. 시위군 중은 1,000명에 달하였다. 4월 5일에는 천도교인과 기독교인 등이 합세하여 다시 1,000여명이 시위를 벌였다. 연일 시위가 벌어 지고 나날이 시위 규모가 확대되자 대관에 주둔하고 있는 헌병 3명, 보병 4명으로 시위를 저지할 수 없다 고 판단한 일제는 4월 5일 삭 주 로부터 헌병 5명을 지원 파견하 였다. 4월 6일에는 다시 더 큰 만 세시위가 있었다. 평안북도 장 관 후지카와(藤川利三郎)의 보 고에 의하면, 시위 참가자가 8,000명에 이를 만큼 엄청난 규모였으며, 그 중 약 200~300 명은 결사단(決死團)이라고 하 여 앞장서서 완강하게 저항했다고 하고 있다. 일제 는 추가 응원병력을 요청하여 보병 14명이 헌병과 함께 총기를 난사하며 시위 군중을 공격했다. 9월 29일자 「조선소요사건의 사상수건(死傷數 件) 보고」 에 의하면 이날 조선인 사망자가 36명, 부상자는 83 명에 달했으며, 주도자 7명이 검거되었다. 4월 3일 양산면 원풍동(院豊洞)에서도 기독교인과 천도교인 등 100명이 만세시위를 벌였다. 삭주군은 평안북도 산간오지였으나 3 · 1운동만 큼은 전국 어느 곳 못지 않게 규모도 컸고, 뜨거 웠다. 최인하 고등법원 판결문  삭주군 외남면 만세시위 참여자 최 인 하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3 ٠ 1운동의 지방시위에 관 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수석연구원 을 역임했고, 현재 3 ٠ 1운동기념사업회 회장을 맡고 있다. 3 ٠ 1운동을 중심으로 우리 역사를 새롭게 정리하는 일에 관심을 갖고 연구와 집필, 강연을 하고 있다. 필자 이정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