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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전설(88회) • 평북 삭주의 만세시위 87 동 길가에서 박형빈(朴亨彬)으로부터 독립선언서, 파 리에서 보내온 전보 번역문 사본 등 총 580장의 문서 를 전달받았다. 김명봉은 서부동 기독교회 목사 박인 도(朴麟道)와 교인 김홍수(金弘洙)에게 독립선언서가 온 취지를 이야기하며 1장씩 전달하였다. 3 · 1운동이 시작된 이후 헌병대가 교회집회를 금지 시킨 가운데서도 박인도 목사는 3월 12일 수요일 밤 에 신도를 모이게 하여 예배를 열었다. 헌병대가 3월 14일 김명봉이 보관하고 있던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 서를 전량 압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월 15일 약 4~500명의 기독 교인들이 삭주 읍내에 모여 만세 시위를 벌였다. 이 날 7명이 검거되었다. 기독교인들은 3월 16일에도 60여 명이 시위를 벌였다. 삭주면 서부동의 김용성 (金龍星), 장친진(張燦鎭), 선언서를 처음 전달받은 김 홍수도 시위에 참여했다. 3월 31일, 4월 1일 삭주면 3천 명 시위 그후 약 2주 동안은 잠잠했다. 그러나 3월 31일 기 독교인과 천도교인이 연합하여 대규모 시위가 삭주 면에서 일어났다. 그날 3월 31일 오전 11시부터 주 민들이 모여들어 삭주헌병분견소를 에워쌌다. 시위 군중은 돌을 던지거나 몽둥이로 유리창을 깨부수는 등 거세게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의 공격으로 헌병 6 명이 부상을 입었다. 오후 1시경 신의주에서 10명의 응원병력이 삭주 읍내에 도착하여 시위대 공격에 합 세했다. 시위대는 잠시 흩어졌다. 그러나 오후 2시, 시위대 가 다시 모여들어 삭주헌병분견소를 에워쌌다. 그때 로부터 밤이 되도록까지 시위가 이어졌다. 시간이 갈 수록 시위군중이 계속 늘어나 3,000명의 대군중이 되었다. 일제 헌병과 응원 보병들이 무차별 발포했 다. 일제 자료에 의하면 3월 31일의 시위에서 7명이 목숨을 잃었고, 40명이 부상당했다. 다음날인 4월 1일 오전부터 다시 수천 명이 모여 들었다. 천도교인이 주도하는 가운데 시위군중은 헌 병분견소를 다시 에워싸고 공격을 재개하였다. 삭주 주둔 헌병과 응원병력은 총기를 사용하여 시위대를 저지하였다. 다시 사망 6명, 부상 12명이 발생하고, 19명이 검거되었다. 이틀에 걸친 시위에서 일제의 무단 발포로 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기 때문에 삭주 의 분위기는 격앙되었다. 조선인 상인들은 일본인에 게 물건을 팔거나 공급하지 않았다. 시위에 참여했던 사람 중 일부는 압록강을 건너 만주의 독립군 대열에 합류했다. 3월 17일 외남면 대관시위 3월 15일 삭주 읍내 만세시위 소식이 즉시 외남면 에 전해졌다. 외남면에서는 기독교인들이 만세운동 대동여지도 삭주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