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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스크랩 • 서구와 기독교, 전통이 어우러진 윤동주의 장례식 81 지 더하여 1945년 2월 16일에 운명하니 그 때 나이 스물아홉이다. 그 재질 가히 당세에  쓰일 만하여 시로써 장차 사회에 명성이 울려  퍼지려 했는데, 춘풍 무정하여 꽃이 피고도  열매를 맺지 못하니, 아깝도다! 그는 하현 장 로의 손자이며 영석 선생의 아들로서 명민하 여 배우기를 즐긴데다 새로운 시를 지어 작품 이 많았으니 그 필명을 동주(童舟)라 하였다.”  독립운동가들, 매일 싸움만 했나? 최근 독립운동가 부인이나 며느리의 수기가 알려지 면서 독립운동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열리기 시작하 였다. 우리는 독립운동가는 밥도 먹지 않고, 나이도 들 지 않으며, 앞으로 돌격하는 마징가Z 같은 존재로 인 식했었다. 그런데, 이들 수기는 독립운동가 역시 남자 혹은 여자였고, 한 가정의 가장임과 동시에 남편이거 나 아내였으며, 아이의 아버지나 어머니 혹은 할아버 지나 할머니였다. 남들과 똑같이 옷을 입고, 밥을 먹으 며, 술도 마시고, 노래도 부르는 ‘사람’이었다. 단지 집 안보다는 나라를 구하고자 나선 애국자였다. 우리는 만주에서 일본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 던 두 전쟁, 봉오동과 청산리를 자랑스럽게 이야기해 왔다. 이 두 전쟁의 승리자는 정규군이 아닌 독립운 동가들로 조직된 비정규군이었다. 그렇기에 전투, 보급, 수송, 지휘 등의 체제를 갖춘 정규군에 비해 식량 보급 등이 거의 불가능하였다. 그럼 이들의 보급은 누가 담당했을까? 서간도와 북간도라고 했던 만주에 살고 있었던 한인들이었 다. 이들은 마을 주변에서 독립군과 일본군의 전투 가 벌어지면 감발(발에 감는 좁고 긴 무명천으로 주 로 먼 길을 걷거나 겨울 추위를 막을 때 사용)을 만들 어 독립군의 언 발을 녹여주고, 주먹밥을 먹여주며 전투에 참가하기도 했다. 이름 없는 한인들의 지원이 없었다면 두 대첩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제, 전투 중심, 싸움 중심의 독립운동사 연구에서 독립운동가의 이면에 숨은 생활문화에도 관심을 기울 일 때다. 그들이 살고 있었던 집, 먹었던 음식, 입었던 옷, 지었던 농사법, 남녀의 사랑법과 연애법, 친구 관 계, 술과 같은 기호 음식, 관혼상제와 같은 의례 생활 등에도 관심을 가짐으로써 독립운동이 어떻게 펼쳐 졌는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열 것이다. 윤동주의 가족; 윤동주의 장례식을 치렀던 집이다. 뒷줄 왼쪽부터 윤 동주의 할아버지 윤하현 부부, 아버지 윤영석 부부, 앞쪽 왼쪽부터 윤 일주와 윤광주 고려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했다(문학박사). 국립민속박 물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학예연구관과 과장 등을 지 냈으며, 현재 (사)규암독립사상연구소 이사, 서울특별 시 동산분과 문화재위원에 재직중이다. 논저로 『코로 나 시대, 다시 집을 생각하다』(2021,공저) ; 『대한독립! 그날을 위한 봉오동전투』(2020) ; 『한국의 상례문화』 (민속원, 2012) ; 「북간도 명동학교 막새기와의 꽃문양 에 나타난 민족의식」, 『독립운동사연구』 48(2014) 등 다수가 있다. 필자 김시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