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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순국스크랩 80 2023년 2월 에 없는 아들이다.”라는 한마디는 집안의 대가 끊길 지도 모른다는 충격과 공포, 일본에 대한 분노의 표 현이었을 것이다. 사진의 장면으로는 발인예배가 어떤 형식으로 진 행되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회고에 따르면 조사 (弔辭)를 할 때 동주가 연희전문 졸업 무렵 교내 잡지 『문우(文友)』에 발표하였던 「자화상」과 「새로운 길」 이라는 두 편의 시를 낭 독하였다고 한다. 이 점 이 그 당시 북간도에서 치렀던 다른 장례식과 구 별되는 점이다. 동주의 장지는 용정의 동산(東山)에 있는 용정 중앙교회 묘지이다. 날씨 가 추웠기에 산소를 제대 로 만들지 못했다. 해동 이 되는 6월이 되어서야 산소에 떼를 입히고 단장 하 였 다 . 이 때 ‘시인윤동 주지묘(詩人 尹東柱之墓)’ 라고 새긴 비 석을 세웠다. 비문을 보면 묘를 정비한 시기는 1945 년 6월 14일 이었고, 동생 일주와 광주가 세운 것으로 되어 있다. 비석은 조부 와 부친이 직접 감독하여 만들었고, 비문은 해사(海 史) 김석관(金錫觀)이 짓고 썼다. “아아! 고 시인 윤군 동주는 본관이 파평이다.  어릴 때 명동 소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회룡현 립 제1교 고등과에 들어가 배웠다. 용정 은진 중학에서 3년을 배운 뒤 평양 숭실중학에 전 학하여 학업을 쌓으며 일 년을 보냈다, 다시  용정에 돌아와 마침내 우수한 성적으로 광명 학원 중학부를 졸업하고, 1938년 서울 연희 전문학교 문과에 진학하여 4년 겨울을 보내 고 졸업했다. 공부는 벌써 이루었어도 그 뜻 은 오히려 남아서 다음 해 4월에 책을 짊어지 고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 동지사 대학 문학부 에서 진리를 갈고 닦았다. 그러나 어찌 뜻하 였으랴! 배움의 바다에 파도가 일어 몸의 자 유를 잃고, 배움에 힘쓰던 생활이 변하여 새 장에 갇힌 새의 처지가 되었다. 거기에 병까 윤동주와 친구들; 뒷줄 오른쪽 윤동주, 가운데  문익환 명동촌 출신들; 뒷줄 오른쪽 윤동주, 앞줄 가운데 송몽규 (사진 소장자가 윤동주는 1945년 2월 16일, 송몽규는 3월 10일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영면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윤동주 묘비 탁본(뒷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