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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스크랩 • 서구와 기독교, 전통이 어우러진 윤동주의 장례식 79 에 영정을 모셨는데, 검은색 리본을 달았다. 유골함과 영정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로만칼라 성직자 복을 입은 장례식 집례자 문재린(文在麟, 1896~1985) 목사를 비롯한 교인들이 평상복을 입고 서 있다. 그 반대편에는 유족들이 서 있고 일반 조객 들은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29세의 미혼인 동주의 장례였기에 나타난 현상으로 보인다. 그만큼 조촐하 고 조용하며, 약식으로 진행된 장례식이었다. 가족들 역시 고인의 조부나 부친, 형제 등 남자는 색깔 있는 평상복에 두건만을 착용한 상태이다. 아마 동주의 동생으로 보이는 일주만이 교복에 고깔을 쓰 고 있다. 여성들 역시 유색의 평상복 차림이고, 연세 가 있는 분들은 머릿수건을 썼다. 윤혜원 등 동주의 여동생 역시 평상복 차림이다. 동주의 영정 사진에 검은색 리본을 건 것은 1934 년에 제정한 「의례준칙(儀禮準則)」의 영향이다. 일제 는 이때부터 전쟁 준비를 하였고, 1940년이면 「국민 복령」을 내려 국민복을 입고 화려한 복장을 하지 못하 도록 조선인까지 옥죄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북간도 한인의 장례식에서 도 나 타나는 의례장(儀禮章) 이나 검은색 완장은 보 이지 않는데, 이 역시 미 혼의 장례식이었기 때 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조선에서와 마찬가지 로 북간도 명동촌을 개 척한 개척자 1세대들에 게는 윗대보다 먼저 죽은 미혼의 죽음에는 곡을 하 지 않고, 장례식 역시 간략하게 하는 법도가 있었다. 모친 김용은 아들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낮에는 일하 다가 밤이 깊으면 동주의 관을 어루만지며 소리 없는 눈물을 지었다고 한다. 이는 29세의 미혼인 아들이 어른보다 먼저 죽었기 때문에 슬픔조차 제대로 표현 하면 안된다는 조선의 전통 예법에 따른 것이었다. 가부장의 전통, 너는 내 하나뿐인 아들이야 ! 윤영석이 동주의 시신을 수습하러 일본으로 가려 하자 동주의 할아버지 윤하현 장로가 반대하고 나섰 다. 규암 김약연(金躍淵, 1868~1942) 선생과 함께 북 간도를 항일 독립운동의 기지로 건설하는 데에 일조 하신 분이다. 그런데, 장손이 ‘독립운동’이라는 죄목 으로 싸늘한 주검이 되어 돌아왔으니 청천벽력이 아 니었겠는가. 8년을 기다렸던 파평윤씨 집안의 대를 이을 장손이 시신으로 돌아왔으니 그 충격을 어찌 표 현할 것인가. 미국의 공습이 날로 거세지던 위험천만 한 일본에 외아들 윤영석을 보내는 것은 곧 집안의 존속을 위협하는 일이었다. 윤하현의 “넌 내 하나밖 윤동주 묘소, 용정중앙교회 동산묘지-1945.6; 윤동주 가족들이 새로 세운 묘비 좌우에 앉았다. 왼쪽 맨 위 윤우현, 중간 좌 윤덕현, 우 윤하현, 아래 좌 윤영석/ 비석 우측 좌 윤광주 그 옆 김용 그 뒤 윤혜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