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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순국스크랩 78 2023년 2월 이었고, 미군의 공습이 날로 강화되던 때였다. 그러니 일본은 전쟁터, 그것도 하늘의 공습이 언제 있을지 모 르는 곳이었다. 1945는 8월 6일 히로시마 원폭 투하 의 전조가 보이던 시기였다.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윤 영석은 오직 아들의 시신을 거두어야겠다는 일념으로 아버지의 만류를 뿌리치고 일본으로 향했다. 후쿠오카 형무소에 도착한 이들은 먼저 송몽규(宋 夢奎, 1917~1945)의 면회를 신청하였다. 무언지 알 수 없는 주사를 맞기 위해 줄을 섰다가 면회 신청을 받고 나온 송몽규는 한마디로 피골이 상접하였고, 반 쯤 깨진 안경을 끼고 있었다. 언뜻 알아보기 힘들 정 도로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함께 갔던 동주의 당숙 윤영춘이 “왜 그 모양이냐?”하고 물었더니 몽규는 “저놈들이 주사를 맞으라고 해서 맞았더니 이 모양 이 되었고, 동주도 이 모양으로….”라고 말을 잇지 못 했다. 동주는 생체실험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참 얌 전한 사람이…. 죽을 때 무슨 뜻인지 모르나 외마디 소리를 지르면서 운명했지요.”라고 했던 젊은 일본 인 간수의 증언 역시 이를 증명한다. 전통과 서구, 기독교식 이 어우러진 장례식 시체실, 동주의 시신은 방부제 덕에 멀쩡한 상태 였다. 시신을 인수하여 후쿠오카 화장장에서 화 장을 하고, 수습한 화장 유골은 현해탄(대한해협) 에 뿌리고, 일부를 작은 사기그릇에 담아 함에 넣 어서 용정으로 돌아왔다. 후쿠오카에서 돌아온 날짜는 정확하지 않지만, 동주 의 장례식이 치러진 날짜는 유난히도 눈이 많이 내렸 던 3월 6일이었다. 시인 윤동주의 장례식은 용정 자택 에서 전통과 기독교식으로 치렀다. 동주가 서거한 지 20일 만이다. 한 장의 사진이 당시 상황을 설명해 준다. 그런데,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일반 장례식과 는 많은 차이가 있다. 명동촌 개척자들이 기독교로 개종한 지도 벌써 30년이 넘었고, 동주의 할아버지 는 당시 장로였기에 기독교식 장례라는 것은 낯설지 않다. 하지만, 가족 중 상복을 입은 사람이 하나도 없 고, 성직자나 교회분들 역시 예복도 입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영정의 크기와 관의 크기가 거의 비슷하고, 영정에는 검은색 리본이 걸려 있어 여러 문화가 겹쳐 있음을 직감하게 된다. 사진의 장례식 장면은 아마도 장례 혹은 발인예배 가 모두 끝난 시점에서 기념 촬영을 한 것으로 보인 다. 용정에 있었던 동주의 자택 마당 제일 안쪽에 자 리를 깔고 탁자를 놓은 다음 흰색 보를 덮어 단을 마 련하고, 그 위에 유골함을 안치하였다. 유골함 앞쪽 윤동주 장례식. 용정자택 1945.3.6; 영정 오른쪽으로 1윤하현 2윤영석 3윤일주 4 윤광주 5김용 6윤혜 원/ 영정 왼쪽으로; 1문재린 4김석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