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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스크랩 • 서구와 기독교, 전통이 어우러진 윤동주의 장례식 77 라는 내용이었다. 위독한 상태에서 보냈을 터인데, 사망 후 10일이나 지난 뒤에 도착하였으니 일본에서 만주까지 4일 걸리는 우편 시간을 생각하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8년을 기다린 끝에 귀하게 얻은 장손 해환이 1917년 12월 30일 8년을 기다린 끝에 아들이 태어났다. 윤동주(1917~1945)의 아버지 윤영석 (尹永錫, 1895~1962)은 물론 할아버지 윤하현(尹 夏鉉, 1875~1947), 어머니 김용(金龍, 1891~1947, 김약연 선생의 누이동생) 모 두에게 큰 기쁨이었다. 아니, 윤씨댁의 큰 경사였다. 1910년 혼인한 동주의 부모는 딸을 낳았으나 일찍 잃고, 혼인 후 8년이 지나도록 아이가 없어 걱정이 태산이었 다. 이는 어머니 김용 여사가 몸이 약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8년 만에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이, 게다가 아들을 낳았으니 집안의 경 사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 기쁨은 동 주의 첫 이름 ‘해환’으로 나타났다. 우리 말로 밝다는 뜻의 ‘해’라는 한글에 빛난 다는 뜻을 가진 한자 ‘환(煥)’을 혼합하여 만들었으니 당시로서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이름이었다. 그래서 학교에서는 한 자로 ‘해환(海煥)’이라고 표기하고, 친구 들은 ‘해환’이라고 불렀다. 은진중학교 에 진학하면서부터 ‘동주(東柱)’라고 부 르기 시작하였다고 친구 문익환(文益換, 1918~1994)은 증언하였다. 고종사촌 송몽규가 들려준 동주의 죽음 윤영석은 아버지의 만류에도 후쿠오카(福岡)행을 결심하고, 신경(新京)에 살고 있던 사촌 윤영춘(尹永 春, 1912~1978)을 만나 여행증명 등의 수속을 밟고, 안동(安東, 현 단둥)을 거쳐 열흘이 걸려 후쿠오카 형 무소에 도착했다. 1945년 2월 당시는 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인 일 본이 연합군인 미국으로부터 점점 밀리고 있던 상황 윤동주의 조부 4형제; 앞줄 왼쪽부터 윤하현, 윤덕현, 뒷줄 왼쪽부터 윤구현, 윤우현 윤동주네 집안 여성들; 앞줄 왼쪽 첫 번째 윤동주의 어머니 김용(김약연 선생의 동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