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page

2월의 독립운동가 • 송몽규 · 안창남 · 김필순 지사 69 도록 지원했다. 그러나 데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 사 건을 빌미로 일제가 조작했던 ‘105인 사건’에 연루 되어 일제의 검거를 피해 1911년 12월 31일 중국 동북(만주)로 망명하였다. 국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 을 준비하고 있었던 신민회의 활동과 관련하여 독 립운동 기지 개척을 목적으로 떠난 것이었다. 서울 을 떠나 조선인들의 집단 거주지였던 중국 통화현 에 정착하였다. 김필순은 근대적 시설을 갖춘 병원 이 따로 없었던 통화현에서 병원을 개설하여 이주 한 조선인들과 독립운동가들의 치료에 앞장섰다. 그는 1916년 8월경 일제의 감시와 간섭이 날로 심 해지고 있는 통화현을 떠나 내몽고 치치하얼로 이 주하였다. 그러나 치치하얼에서 북제진료소를 개 설하고 의료활동에 종사하면서 독립운동기지를 건 설하기 위해 애쓰다가 김필순은, 1919년 8월 31일 갑작스럽게 순국하였다. 그의 순국 과정은 명확하 게 밝혀진 바는 없다. 매제(妹弟)였던 김규식과 연 계하여 국제사회에 임시정부 설립을 널리 알리고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매진하고 있는 김필순의 독 립운동을 막고자 했던 일제에 의해 독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부에서는 김필순 지사의 공훈을 기 리어 199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청년 독립운동가들의 숭고한 헌신과 희생 독립운동에 앞장서다가 젊은 나이에 순국하신 송몽 규, 안창남, 김필순 지사님들의 삶은 오늘 우리에게 무 엇보다 교육의 중요성과 배운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 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일제는 식민지 노예 교육을 통해 조선 사람들은 식민 통치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무능한 존재임을 각인시키고자 했다. 그러 나 이들은 식민 지 조선인으로 서 자신의 위치 와 역할을 분명 히 자각했다. 이들은 자신들 의 삶을 통해 자신의 존재에 대한 주체적 자 각의 중요성을 분명하게 보여 주었다. 그리고 더 나 아가 할 수 있 는가? 하는 현실의 문제를 넘어서, 반드시 해야 할 일 인가? 하는 당위의 문제가 더욱 중요함을 분명하게 보 여주었다. 이들에게 조선의 독립은 현실적으로 가능 한 과제는 분명히 아니었으나,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당위의 과제였다. 조선인으로서의 주체적인 자각을 통해 이들은 모두 조선의 독립은 필연적이라고 확신 하고 헌신했다. 흔들리지 않는 삶을 위해 필요한 것 은 무엇보다 객관적으로 자신의 위치를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부족하더라도 자신을 긍정하 고, 오늘의 현실에서 노력하면서 미래를 일구려는 모 습을 자신들의 삶을 통해 보여주었다. 이들은 특히 공부와 배움을 자신의 주체적인 삶 을 실천하기위한 수단으로 삼고, 오늘 내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고민하였다. 계속되는 좌절 속에 서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주체적인 삶을 꾸리며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30대 시기의 김필순 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