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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의 독립운동가 • 송몽규 · 안창남 · 김필순 지사 67 월 조선인으로서는 처음으로 3등 비행사 면허를 취 득했다. 면허를 취득한 뒤 귀국하여 고국방문 비행 계획과 비행학교 설립의 포부를 밝혔다. 1922년 6 월. 2등 비행사 면허를 받은 안창남은 고국방문 비 행을 준비하였다. 그는 금강호(金剛號)로 명명된 비 행기에 탑승하여, 1922년 12월 10일부터 13일까지 서울과 인천 등지에서 고국 방문 비행에 나섰다. 그 의 고국방문 비행은 식민지 청년들에게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과, 우리 조선 사람도 할 수 있으며 하면 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 것이었다. 일본으로 돌아간 안창남은 1923년 6월 민간 비 행가 경쟁대회에서 입상하였고 7월에는 1등 비행 사 면허를 취득하였으나, 9월에 관동(關東) 대지진 을 겪게 되었다. 안창남은 고국방문 비행과 관동 대 지진을 겪으면서 식민지 조선인으로서 자신의 위 치와 역할을 분명히 자각하게 되었다. 자신의 비행 기술을 민족을 위해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 기 시작했던 안창남은, 비행기를 이용 한 항 공 독립운동을 추진하고 있던 임시정부와 연결되었다. 그는 1924년 12월경 비밀리에 임시정부의 교통사무국 역할을 수행하던 이 륭양행의 도움으로 중국 상해에 도착했다. 그는 중국 혁명운동을 통한 한국의 독립운 동을 구상하고 있었던 여운형의 소개로 중 국 군벌에 가담하였다. 안창남은 국민혁명 군의 반제국주의 이념에 동조하며 반일(反 日)항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독립 군 비행사 양성을 모색하였다. 1926년에 안창남은 여운형의 도움을 받 아 항일무장투쟁에 참여하고 있던 산서성 군벌 염석산 군(軍)의 항공사령관으로 활동하게 되 었다. 안창남은 자신의 지위와 자금력을 바탕으로 신덕영 · 최양옥 · 김정련 등과 함께 1928년 대한독립 공명단을 조직하였다. 공명단은 군자금을 모집하여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조선인 군대를 양성하여, 국 내 진공작전을 구상했다. 안창남은 600여 원의 자 금을 지원해 최양옥 · 김정련 · 이선구를 국내에 파견 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고자 했다. 중국에서 20대 시기 안창남 ‘금강호’ 조종석에서의 안창남 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