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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이수흥 의사 53 단구였지만 의지가 매우 굳은 것을 알아보고 독립군 인재로 키우고자 자기 집으로 데려와 제자로 삼았다. 함께 있는 동안 이수흥이 자 신과 함께 최익현 의진에서 활동했던 동지 이일영(李日榮)의 아들임을 알게 되었다. 채상덕은 더욱 정성을 들였고, 제자 이수 흥 또한 스승의 노력에 부응해 훌륭한 독립 군 인재로 커갔다. 1923년 7월 채상덕은 이 수흥을 독립운동 인재로서 더욱 실력을 쌓을 수 있도록 북만주 액목현(額穆縣)에 있는 신 명학교(新明學校)로 보냈다. 이수흥은 이듬해 2월까지 신명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채상덕 이 있는 남만주로 돌아왔다. 그가 돌아오자 채상덕은 집안현(輯安縣)에 본부를 둔 참의부 에 가입시켰다. 채상덕은 남만주에서 통군부를 결성할 때 총장으로 취임했는데, 통의부 결성 시에는 부총재로 취임했다는 기록이 있다. 의병계열 의 인물들이 모여 새롭게 의군부를 결성했을 때 총재로 취임했으나, 곧 집안현(輯安縣)으 로 은거하였다. 참의부 고마령 참변과 채상덕의 자결 그런데 참의부는 출범한지 약 1년이 채 되 지 않은 1925년 3월 16일 큰 참변을 당하고 말았다. 한국의 초산 대안인 집안현 고마령 (古馬嶺)에서 5개 중대의 간부를 비롯한 대원 들이 모여 군사회의를 개최하였다. 참의부의 주요 간부들이 대부분 모인 회의였다. 이 회 의를 밀정 이죽파(李竹坡)가 일제 경찰 초산경 찰서에 밀고하였다. 첩보를 입수한 초산 일본 경찰대는 대병력을 몰래 침투시켜 고마령의 참의부 회의장소를 기습 공격했다. 일본경찰 이 기습하자 참의부 대원들도 대항하여 공방 전을 펼쳤지만, 역부족이었다. 안타깝게도 참 의장 최석순(崔碩淳) 등 29명이 전사하고, 많 은 대원들이 부상을 입고 피신해야 했다. 이수흥도 이 전투에서 부상을 당했으나 가 까스로 빠져나와 이 사실을 스승인 채상덕에 게 알렸다. 참의부의 많은 부하가 전사하고 중상을 입었다는 소식에 채상덕은 큰 슬픔에 빠졌다. 먼저 자식 같은 제자 이수흥을 병원 에 입원시켰다. 약 한 달간 치료를 받은 이수 흥은 몸이 완쾌되지 않았으나, 상당히 회복 되어 돌아왔다. 그때까지 비통함에 젖어있던 채상덕은 이 수흥을 앞에 앉혀놓고 “너는 아직 나이는 어 리되 의지는 굳은 청년이니 조선의 독립운동 을 할 수 있는 터라, 내 일찍부터 내 뜻을 본 받을 사람을 구하였으되 아직 얻지 못하였 다가 너를 보매 버릴 수 없으니, 독립군이 되 어 내 뜻을 저버리지 말라”라고 말했다. 이어 서 “기회를 엿보아 거사를 하되 조선인의 결 함인 단체적 훈련의 부족과 배반자의 속출로 단체적 행동은 할 수가 없으니, 언제든지 안 중근을 본받아 개인적 행동을 하여 나라를 독립케 하라”는 훈계를 하였다. 그리고 통화현(通化縣) 강산이도구(崗山二 道溝) 회당촌(會堂村) 김운용(金運用)에게 맡 겨 두었던 권총 두 자루를 찾아 쓰도록 부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