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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기삼연 의병장 51 력을 총동원하여 10개 종대로 이른바 ‘폭도 토벌대’를 편성하고 탄압에 나섰다. 그리하 여 이들 토벌대는 1908년 1월 24일부터 광 주, 나주, 장성, 함평, 순창 등지에서 의병부 대를 추적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기삼연은 300여 명의 의병부대를 이끌고 법 성포에서 장성을 지나 1월 30일 담양의 금 성에 도착하였다. 하지만 의병부대가 금성에 도착하여 대오를 정비하고 있던 중, 담양 주 둔 일본 군경이 습격해 왔다. 이에 의병부대 는 이들과 치열한 교전을 벌였지만, 30여 명 의 의병이 전사하는 등 큰 피해를 입고 말았 다. 이 때 의병부대는 적에게 완전히 포위되 어 위기에 빠졌다. 때문에 기삼연은 의관을 정제하고 최후를 각오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지척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짙은 안개가 깔 려 병사들을 이끌고 적의 포위망을 무사히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일본군에 의해 피살, 58세에 순국 담양 금성에서 참패를 당한 기삼연 의병부 대는 바로 순창의 복흥산으로 들어가 은신하 였다. 그것은 그동안의 전투로 전력이 크게 소모되었을 뿐만 아니라, 연일 혹한이 계속되 어 더 이상 항전이 곤란했기 때문이다. 더욱 이 음력 설날이 다가오자 병사들은 귀향하여 과세(過歲)하기를 원했다. 이에 기삼연은 의병 들에게 일시 해산을 선언했다. 의병들을 각자 귀향시켜 설을 지내게 한 다음 정월 보름에 다시 집결하도록 한 것이다. 의병부대를 해산한 뒤 기삼연은 그 부근에 살던 기구연의 집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였 다. 그러나 일본군에게 은신처가 탄로나 설 날 아침 피체되고 말았다. 그의 피체 소식을 접한 선봉장 김태원은 구원하기 위해 장병 30여 명을 인솔하고 급히 출동하였다. 그리 하여 광주로 가는 길목인 경양역에 이르렀으 나, 이미 일행이 지나가고 난 뒤였으므로 달 리 방도가 없었다. 일본군에 피체되어 담양을 거쳐 광주로 호 송된 선생은 다음날인 1908년 음력 1월 2일 (양력 2월 3일), 광주 서천교 백사장에서 피 살되어 58세를 일기로 순국하고 말았다. 이 는 기삼연을 추종하는 의병부대의 구출 작전 을 두려워한 일제가 재판도 없이 서둘러 학 살한 때문이었다. 참으로 장렬한 최후였다. 기삼연 순국기념비(광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