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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붓’과 ‘검’: 「조선혁명선언」 전야 신채호의 내면 43 단재의 내면에는 늘 ‘붓’과 ‘검’이 병존 하면서 갈등하였고 번갈아 표출되었 다. ‘검’이든 ‘붓’이든 그는 ‘사랑’보다는  ‘투쟁’을 찬양하였다. 1923년 1월 「조 선혁명선언」이 ‘검’을 통한 ‘투쟁’에 대 한 찬양이라면, 1924년 단재는 극단 적 궁핍으로 관음사에 들어가 스님 이 되고 ‘붓’을 들어 조선사 집필로 호 구지책으로 삼았다. 그러나 얼마 되 지 않아 환속하였고 다시 ‘검’을 든 무 정부주의자가 되어 투쟁의 길을 떠나  여순감옥에서 죽음에 이르렀다.  중국 베이징의 이회영과 신채호, 그리고 중국인 1922년 12월 단재 신채호(1880~1936)가 의열단의 김원봉으로부터  간곡한 요청을 받아 상하이(上海)로 가서 1개월 여의 준비 끝에 1923년  1월 「조선혁명선언」을 쓴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이 글을 통해 「조선혁 명선언」 집필 전야 단재의 내면을 살펴보고자 한다.  단재는 인생 후반 반평생을 해외에서 망명 생활을 하였는데, 가장 오 래 머문 곳이 중국 베이징(北京)이었다. 1910년 칭따오(靑島) 망명을 시 작으로 여러 곳을 전전하다 1914년 베이징에 왔으며, 1919년 상하이 로 가서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했으나, 노선 대립으로 다시 베이징 으로 왔다. 단재의 베이징 행 배후에는 우당 이회영(1867~1932)의 초 청이 있었고, 1920년 봄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의 중매로 만 25세의 박 자혜(1895~1943)와 결혼하여 서성구(西城区 ) 진스팡제(錦什坊街) 21 호에서 신혼 살림을 차렸다.  1921년 아들 신수범이 출생했고, 단재는 유 자명(1894~1985)을 통해 중국의 아나키스트  선구자인 북경대학 교수 리스정(李石曾, 1880- 1973)을 만나게 되고, 리스정을 통해 리다자오 (李大釗, 1889~1927) 등 중국의 혁명적 지성인 들을 접하게 되었다. 그러나 단재는 극도의 경 제적 궁핍에 처하였다. 그리하여 1922년 생활 고 때문에 부인 박자혜와 어린 아들 신수범을  귀국시키고, 홀로 석등암(石灯 庵)의 남루한 셋 방에 기거하였다. 1922년 당시 이회영은 서성구 이안정(二眼 井)에 살고 있었다. 이회영의 이안정 집터에 대 해 잘 못 알려진 경우도 많으나 현재 중국연통 ➋ ➊ ➊  석등암: 입구의 회나무는 남아 있고, 대웅전 자리에는 6층 아 파트가 들어서 있다.  ➋  이회영의 이안정 집터는 완전히 변하여 중국연통(聯通) 빌딩 이 들어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