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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2023년 2월 Special Theme  「조선혁명선언」 100년! 새로운 사회 건설을 꿈꾸다 이는 거사 과정에서 미국인 여성 여행객과 경관  등 무고한 사상자가 발생한 것과도 관련이 있었다.  의열단으로서도 암살파괴 거사에 수반될 수 있는 무 고한 인명 피해에 대한 경각심을 가질 수 있는 계기 였지만, 상하이 거주 외국인들 사이에서 의열단에  대한 여론이 나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을  틈타 일본 총영사관은 공동조계 및 프랑스조계 당국 에 압력을 가했고, 이에 굴복한 양 조계 당국은 한인  독립운동자의 총기류 휴대 및 사용을 포함하는 일체 의 ‘불온 행동’에 대한 단속 강화 방침을 공포했다. 주 중 미국대사관 공사도 “조선인 독립당이 목적을 달 하기 위하여 공산주의자의 행함과 같은 잔혹한 수단 으로 나옴은 미국은 물론 세계 어느 나라든지 찬성 치 아니하는 바이다”라고 하면서 이 조치를 거들었 다. 이에 김원봉 등 의열단 지도부는 자기들의 투쟁 노선의 정당성을 논리적으로 석명하고 재정립 할 필 요가 있음을 절실히 느꼈다. 그것이 1년 뒤에 신채호 가 작성한 「조선혁명선언」이 ‘의열 단선언’으로 작성,  발표되는 중요한 배경을 이루었다. 의열단 선언문 작성 적임자로 김원봉에게 신채호 를 추천한 사람은 평소 신채호를 스승처럼 따랐던  류자명(柳子明)이었다. 두 사람은 베이징으로 신채 호를 방문하여 선언문의 기초를 간청하였다. 그들은  신채호를 상하이로 초빙하여 자신들이 비밀리에 운 영하고 있던 폭탄 제조소로 안내하여 자신들의 투쟁  의지를 확인시켜 주었다. 류자명은 신채호와 함께 약 1개월여를 의열단 비 밀사무소에서 기숙하며 「조선혁명선언」의 집필을  지원하였다. 아직 아나키즘과 의열투쟁 이론이 정립 되지 못한 단재에게 류자명의 지원은 「조선혁명선 언」의 집필에 큰 도움이 되었다. 김원봉이 류자 명으 로 하여금 단재의 집필을 지원하게 한 까닭도 그가  의열단 창단 이념이나 투쟁 강령에 누구보다 정통했 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류자명은 자신이 남긴 여러 기록에서 「조선혁명선 언」에 대해 설명하고 있으나, 집필 과정에서 자신의  역할을 일부러 내세우지는 않았다. 그가 「의열단간 사(義烈團簡史)」를 정리했다는 박태원의 기록이 있 으나, 이것이 별도의 저술인지 아니면 회고록의 기 술인지 분명치 않다. 류자명이 회고록에서 기록한  의열단 선언문 작성 과정과 선언문의 주요 내용 등 은 그의 역할이 작지 않았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그 는 회고록에서 의열단 선언문에서 강조한 사항을 6 류자명이 중국 잡지에 기고한 「조선 애국사학가 신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