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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Inside  길 따라 얼 따라 이야기가 있는 우리 땅 106 2023년 2월 게 폭탄을 던져 항일의거를 일으 킨 곳(당시 남대문역)이다. 일제 (日帝)의 사형선고로 1920년 11월 29일 순국하시었다.” 애초에 이 표지석은 1986년 8 월 서울역의 좌측 승객 출구에 세 워져 있다가 위치가 틀렸다는 지 적에 따라 서울역 우측 입구에 옮 겨 세워진 것이다. 그러나 표지석 에 새겨진 비문이 너무 짧을 뿐아 니라, 일부 표현에는 잘못된 부분 마저 있는 형편이다. ‘일본 총독’ 이라고 표시된 것은 ‘조선총독’으 로 수정되어야 한다. 그리고 강의 사가 순국한 장소, 즉 과거의 서 대문형무소가 명시되어야 할 것 이다. 조선총독부에서 세운 서울역 건물은 1981년 9월 사적 제284 호로 지정되어 일정한 보호와 관 리를 받고 있다. 구 서울역사는 지 금 ‘문화역 서울 284’라는 복합문 화공간으로 쓰이고 있다. 한편 강 우규 의사의 의거 표지석은 묘하 게도 서울역 역사 안내판 바로 앞 에 위치해 있다. 그런데 서울역 역 사(驛舍) 안내판은 그럴듯한 겉모 습에 우리말은 물론, 영어와 일본 어까지 부기하여 상세히 역사를 설명하고 있는 반면, 강우규 의사 의 표지석은 소략하기 이를 데 없 고, 그 내용마저 부실해 보여 안타 까운 심정이다. 강우규 의사가 1919년 9월 2일 오후 5시 거사할 당시 나이는 무 려 65세였다. 직접 의열무장투쟁 에 투신하다 일본 경찰에 붙잡힌 독립운동가로는 전무후무한 많은 나이였다. 신임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 (齋藤實)을 처단하는 데는 실패했 지만, 37명에 달하는 많은 관헌들 을 살상했으니 그 충격이 매우 컸 다고 할 수 있었다. 강의사는 거사 직후 현장을 유유자적하며 여유 있게 빠져나와 서울 시내에 잠적 했으나, 유감스럽게도 의거 발생 15일 만에 일제의 주구인 한국인 경찰 김태석(金泰錫)에게 붙잡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 리하여 1920년 11월 19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하고 말았다. 그러나 강의사는 순국할 당시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고 태연하 게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그의 의연한 기개와 자신감을 유감없 이 나타내고 있다 하겠다. “단두대 위에 홀로서니 봄바람이 감도는 구나(斷頭臺上 猶在春風), 몸은 있 어도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상이 없으리요(有身無國 豈無感想).” 강 우규 의사가 순국한 곳, 즉 서대문 형무소는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으로 단장되어 수난의 근대사를 실증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우리 모두 그냥 지나치기 쉬운 서울역과 그 주변의 작은 흔적과 기억, 이 땅의 이야기에도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❽ ❽ 2011년 9월 세워진 동상 ❾ 강우규 의사(서대문형무소 수감시) 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