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page

순국 Inside  길 따라 얼 따라 순국 역사기행 100 2023년 2월 의 혈기왕성한 젊은 피는 영원한 혈전(血戰)을 벌일 것을 선언하는 과격함까지 보였다. 그리고 그들 의 독립선언 준비는 체계적이었 고, 조직적이었으며 치밀함까지 보인 것을 볼 수 있다. 독립선언서 를 기초한 이광수를 상해로 송계 백을 국내 밀사로 파견하여 그들 의 독립운동을 알리는 사전 준비 도 철저했다. 국내 밀사였던 송계백의 임무 는 막중했다. 국문(國文)으로 독립 선언서를 인쇄하려면 국문활자를 구해야 했다. 또한 조선에서 독립 운동을 하고 있던 어른들께 자신 들의 움직임을 알리며 자금을 후 원받는 임무를 띠었다. 여기서 우 리는 상해로 파견되었다가 일본 동경 2 · 8독립선언 현장에는 참여 하지 못했던 이광수의 이야기는 접어두기로 하자. 그가 일경(日警) 에 피체되지 않고 몸을 보존하여 훗날 「민족개조론」을 쓰게 되고, 조선인의 미개함을 강조했다는 것도 나중에 다루기로 하자. 그가 ‘무정’과 ‘흙’과 같은 소설을 써서 문학의 대부(大父)의 자리를 얻은 것도 여기서는 다루지 않기로 하 자. 그러나 그때 밀사로 파견되었 던 또 한 사람 송계백에 대해서 우 리는 주목해야 할 것 같다. 우리들에게 송계백(宋繼白, 1896~1920)은 널리 알려지지 않 았다. 나도 이번에 동경 YMCA회 관을 여행하지 않았다면, 그의 이 름조차 몰랐을 것이다. 그는 백제 의 마지막 명장 계백(階伯)장군과 이름이 같다. 한자를 달리 쓰긴 하 지만 발음이 똑같다. 해서 이름이 쉽게 외워지니 그의 이름을 이제 잊어버리지 않을 것 같다. 일본에 유학을 갔다가 일본 경찰에 피체 되어 감옥에서 사망했다는 점은 윤동주 시인과 똑같다. 사각모 속에 수건을 감추어 일 본의 눈을 피해 현해탄을 건넜던 송계백. 그의 가슴은 조였을 것이 다. 모자 속에 수건이 일본에게 발 각되면 자신과 일본 유학생 600 여명이 어떻게 될는지 모르지 않 을 그였으리라. 거사(擧事)도 하기 전에 모든 것은 낭패로 돌아갈 것 이었다. 그의 수건에는 잔글씨로 2 · 8독립선언의 초안문이 쓰여 있 었으니 말이다. 그는 무사히 현해 탄을 건넜고 서울에 현상윤(보성 중학교 선후배 관계)에게 독립선 언서의 초안, 수건을 보인다. 현상 윤은 동경 유학생들 계획에 감동 하여 중앙학교 교장인 송진우, 최 남선에게 그 수건을 보인다. 또한 송계백은 보성학교 은사였던 최 린에게 보였고, 최린은 자신이 믿 는 천도교 교주 손병희 선생에게 수건을 전달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손병희 선생 에게 2 · 8독립선언서 초안이 전해 진 것을 주목해야 한다. 손병희 선 생은 기미 독립선언서에 민족대 표 33인 중에 첫 번째로 서명을 했던 분이다. ‘어린 학생들도 이처 럼 갸륵한 일을 하는데, 어른이 가 만히 있을 수 없다’고 여겼을 것이 다. 손병희 선생은 최린을 매개로 기독교와 불교계와의 접촉을 이 루게 했다. 종교계의 연합전선이 형성된 것이다. 하여 3 · 1 운동 계 획은 급박하게 추진되었다. 이것을 놓고 보면, 송계백의 역 할은 동경유학생들의 2 · 8독립선 언과 3 · 1 독립선언이 있도록 연결 하는 고리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고 서둘러 다시 현해탄을 건넜다. 2월 8일 동 료 학생들과 거사를 일으키기 위 해서였다. 그는 600여명(592명)의 유학생들과 함께 동경 조선 기독 교청년회관(YMCA)에 모였다가 일경에 잡혔다. 출판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금고 7개월 15일을 언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