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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 장 │ 순국 선 열 길 따 라 얼 따 라 87 하려 하였는데, 양측 학생들 수백명은 광주역 남쪽 약 2 정 거리 떨어져 있는 성저리의 토교를 사이에 두고 대치 하였다. 당시 언론보도를 보면 상당수 일본인 학생들이 단도를 갖고 있었고, 양측 여학생들이 나와 부상자를 치 료하고 응원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경찰과 교사, 소방대 까지 출동하여 이들을 해산시킴으로써 그 이상의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학교로 돌아온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 들은 다시 대오를 정비하여 가두시위에 나섰고 이것이 광주학생운동으로 이어졌다. 광주 어등산 전적지 어등산은 광주를 비롯한 장성·나주·함평 등지를 잇는 지리적인 요충지이자, 3~4개 군의 경계에 위치 하여 관할구역이 애매해 일본군경의 추적을 따돌리 기에 좋은 곳이다. 1908년 4월 25일에는 의병장 김태 원(김준)을 비롯한 의병 23명(혹은 13명)이 3시간여 의 격전을 치르다가 어등산에서 순국하였다. 또 1909 년 1월 10일에는 김태원 의병부대의 선봉장을 지내다 독립한 조경환 의병장 이하 의병 20명이 전사하고, 10명은 어등산 자락 운수동(雲水洞)에서 피체당하였다. 그해 9월 26일에는 양동환(梁東煥) 의병장과 의병 80명이 전투를 벌이다가 10명의 전사자를 냈다. 전해산 의병부대의 중군장을 맡았던 김원범 (金元範)도 어등산에서 순국하였다. 이와 같이 이곳은 여러 의병들의 원한이 서린 곳이다. 2008년 11 월 14일, 광주 광산구는 김태원 의병장을 비롯한 한말의병들이 최후를 맞은 곳으로 추정되는 마당바 위 인근의 토굴과 석굴에 각 1개씩 유적지 안내판을 설치하였다. 전라북도 임실 운현 전적지 이석용(李錫庸, 1877~1914)은 1907년 9월 12일 전라북도 진안군 마이산 남록 용암에서 호남의병 창의동맹단을 결성하고 의병대장으로 추대된 뒤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진안·용담·전주· 운봉·함양·임실·남원·순창 등지를 누비며 왜적과 접전하여 수많은 전과를 올린 이석용 의진은 한때 500여 명의 의병이 가담하였다. 1908년 3월 17일 임실읍을 습격한 이석용 의진은 기병대장을 비롯한 다수의 일본군을 사살하는 전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났던 토교 터 김태원 의병부대 어등산 전투지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