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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장 │ 순국선 열 독 립 항쟁사 71 개헌을 둘러싼 어떠한 결정도 내리지 못한 채 회의는 오랫동안 제자리걸음을 반복하였다. 임시정부는 별다른 활동 없이 명맥을 유지하다 1925년 이승만을 탄핵하고 국무령 중심의 내각책 임제를 채택하며 새로운 조직으로 거듭났다. 하지만 임시정부의 위치는 이미 약화된 상태였으며 자 금과 인력도 거의 바닥을 드러냈고 일제의 감시와 탄압은 더욱 집요해졌다. 독립항쟁에 활력소를 불어넣다 | 한인애국단의 활약 침체기에 빠진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에 다시 활력을 불어넣을 획기적인 대책이 필요하였다. 1931년 임시정부의 국무령이었던 김구는 한인 애국단을 조직하였다. 한인 애국단은 일제의 주요 인물을 제거하기 위하여 조직된 비밀 독립항쟁단체로 이봉창, 윤봉길, 최흥식, 이덕주 등이 단원 으로 활약하였다. 김구는 첫 번째 거사로 일본 왕 히로히 토를 암살하기로 계획하였다. 독립항쟁 에 몸을 바칠 것을 맹세한 이봉창이 자 원하였다. 그는 상하이의 일본인 인쇄 소와 악기점 등에서 일하며 거사를 준비 하였다. 1931년 12월 수류탄과 거사자금 300원을 들고 일본으로 떠난 이봉창은 도쿄에 도착해 조만간 일본 왕이 도쿄 교외 요요키 연병장에서 관병식을 거행 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이를 기회로 거사 를 실행하기로 계획하였다. 1932년 1월 8일 도쿄 고지마치 구 밖 사쿠라다몬에서 이봉창은 군중으로 가장하여 기다리다 일왕의 행렬이 관병식을 마치고 나오자 군중 밖으로 뛰쳐나와 행렬을 향해 수류 탄을 던졌다. 하지만 일왕이 탄 마차를 잘못 안데다 거리가 멀어 일왕을 명중시키지 못하였다. 그 자 리에서 이봉창은 품안의 태극기를 꺼내 만세를 불렀고 체포되었다. 일제의 심문에 일체 불응한 이봉 창은 비공개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아 그 해 10월 10일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이봉창의 의거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지만 그 파장은 엄청났다. 중국 국민당 기관지 국민일보 를 비롯한 중국의 각 신문은 이 일을 대서특필하였고 이봉창 의거에 자극받은 중국의 항일항쟁은 한 층 거세졌다. 일본은 이봉창 의거에 대한 중국 언론의 태도를 꼬투리 삼아 상하이를 침략(상하이 사 변)하였다. 재판에 출정하는 이봉창 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