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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행과 부산의 백산상회가 군자금 전달의 거점 역할을 담당하였다. 또한 다양한 문화 활동도 전개하였는데, 상하이에 초등과정의 인성학교와 중등과정 의 삼일학교를 설립하는 한편, 기관지인 독 립신문을 발행하여 임시정부의 활동과 투쟁 상황을 알렸다. 또한 사료 편찬소를 두어 안 창호 등의 주도하에 한일 관계 사료집을 간 행하도록 하였다. 사료집은 국제연맹회의에 우리 민족의 독립을 요청하기 위한 자료로 제출하기 위하여 4책 분량으로 펴냈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전개 1919년 조직된 이후 활발한 활동을 해오던 임시정부는 1921년 큰 고비를 맞았다. 임시정부의 국내 기반 역할을 해오던 연통제와 교통국 조직이 드러나 붕괴되면서 독립항쟁자금이 부족해지고 인력난 이 가중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외교 활동도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 사이에 독립항쟁방향에 대한 의견 차이가 생기면서 무장 독립 전 쟁론과 외교 독립론, 실력 양성론 사이의 갈등도 깊어졌다. 그 와중에 임시정부의 대통령을 맡은 이 승만이 국제 연맹에 우리나라의 위임 통치를 청원하고 나섰다. 지나친 외교 활동에 불만을 가져온 인사들은 이승만의 퇴진을 주장하며 임시정부를 개조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1923년 상하이에서 국내외 독립항쟁 단체들이 한자리에 모여 국민 대표 회의 를 열었다. 독립항쟁의 방향을 모색하고 새로운 정치 체제를 논의하기 위한 자리 였다.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정부 를 만들자는 의견과 정부 조직만 바꾸자 는 의견이 팽팽히 맞섰다. 임시정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하이에 설립한 초등과정의 인성학교 1942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제34회 임시의정원 일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