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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장 │ 순국선 열 독 립 항쟁사 59 참변을 일으킨 것이다. 일본군은 3~4개월 동안 닥치는 대로 마을을 불태우고 재산과 식량을 빼앗았 으며 한인들을 학살하였다. 마을 전 주민이 몰살당하여 마을이 폐허가 되기도 하였다. 간도 참변으 로 1920년 10월 9일부터 11월 5일까지 3,469명이 학살되었다 하니 3~4개월 동안 자행된 일본군의 만행으로 희생당한 수효는 이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다. 일제의 보복작전이 극심해짐에 따라 만주 각처에서 활동하던 독립군 부대들은 새로운 독립 기지 를 건설하기 위해 러시아·만주 국경지대인 밀산부에 모였다. 1920년 12월 북로군정서·대한독립 군·대한국민회·대한신민회 등 10개 독립군 부대들은 하나의 독립군 부대로 통합하기로 의견을 모 으고 서일을 총재로 한 3,500명 규모의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였다. 러시아로 이동한 대한독립군단은 러시아와 군사협정을 맺으며 일본군 토벌에 나섰다. 이를 안 일 제는 독립군부대에 무장해제 명령을 내리도록 러시아에 요구하였고 결국 러시아는 무장해제 명령을 내리면서 이에 따르지 않는 독립군들을 공격하였다. 이러한 자유시사변으로 독립군부대는 많은 희 생자를 내며 만주로 되돌아왔다. 대한독립군단은 1922년 재조직되어 다시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만주 지역에서의 항일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자 일제는 독립항쟁과 독립군들을 탄압하기 위해 1925년 만주 군벌과 미쓰야 협정을 맺고 중국을 통해 우리 민족의 독립항쟁을 탄압하였다. 만주 관 리들의 강력한 독립항쟁단속으로 만주에서의 독립군 활동은 약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일제의 탄압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루어지면서 만주에서의 독립 투쟁은 잠시 침체되기도 하였다. 이에 만주 지역 독립항쟁단체들은 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일환으로 독립군 단체 통합 운동을 추진하였다. 1922년 대한통군부가 조직되어 통의부로 확대되고, 통의부를 이탈한 일부조직이 1923 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직할 부대를 표방하며 남만주에 참의부를 결성하였고 당초 통의부는 1924 년 남만주에 자치 정부로서의 성격이 강한 정의부를 세웠다. 또한 자유시 참변을 겪고 연해주에서 돌 아온 대한독립군단을 중심으로 1925년 북만주에 신민부를 조직하였다. 대한통의부 1922년 2월에 서간도에서 활동하던 광복군총영·대한독립단·광한단·한교회 등의 단체가 결합 하여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를 결성하였다. 그후 대한통군부는 문호를 개방하여 서로군정서, 평북 독판부 등 8개 단체를 영입하고, 1922년 8월 23일, 봉천성 환인현 남구 마권자(馬圈子)에서 열린 남 만한족통일회에서 남만주지역 독립군 통합기관으로서 대한통의부를 발족시켰다. 대한통의부는 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