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page

58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청산리대첩 대한북로독군부, 북로군정서군 등 연합군대가 일본군에게 대승을 거두 어 한국 무장 독립투쟁사에 의미있는 한 획을 그었다. “교전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되었다. 굶주림! 그러나 이를 의식할 시간도 먹을 시간도 없었다. 마을 아낙네들이 치마폭에 밥을 싸서 가지고 빗발치는 총알 사이로 산에 올라와 한 덩이 두 덩이 동지들의 입에 넣어 주었다. … 얼 마나 성스러운 사랑이며, 고귀한 선물이랴! 그 사랑 갚으리, 우리의 뜨거운 피로! 기어코 보답하리, 이 목숨 다하도록! 우리는 이 산과 저 산으로 모든 것을 잊은채 뛰고 또 달렸다.” - 청산리 전투에 중대장으로 참전한 이범석의 회고록 『우등불』 중에서 을 가하여 전멸시켰다. 이 때 일본군 전사자는 200명을 넘었다. 그 무렵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홍범도 부대도 일본군과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일본군을 독립군으로 오해한 또 다른 일본군 부대 와 협공하여 400여 명의 일본군 부대를 전멸시키는 쾌거를 거두었다. 김좌진 부대는 다시 어랑촌 부근에서 머물고 있던 일본군 부대들을 이동하며 공격하였고 여기에 홍범도 부대가 합류하여 강화된 전력으로 일본군 부대를 전멸시켰다. 계속해서 독립군은 일본군과 쫓고 쫓기는 접전을 벌였고 일본군이 수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사실상 독립군의 승리로 끝났다.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6일 동안 10여 회에 걸쳐 산발적으로 벌어진 전투에서 독립군은 전사자 100여 명을 내고 일본군 1,200여 명을 사살하였다. 이는 항일 독립전쟁사에서 가장 큰 규모 의 전투이자 최대의 전과를 올린 승리로 기록되고 있다. ■ 독립군을 재정비하다 | 3부의 성립과 통합 운동 1920년대 만주·연해주 일대의 무장 독립 투쟁은 승전의 연속이었다. 1920 년 홍범도의 대한독립군과 안무의 국민 회군, 최진동의 군무도독부군 등이 연합 하여 벌인 삼둔자 전투와 봉오동전투, 그리고 홍범도의 대한독립군과 김좌진 의 북로군정서군 등의 연합 부대가 참가 한 청산리대첩은 모두 일본군에 대승을 거두어 한국 무장 독립 투쟁사에 빛나는 승전보를 기록하였다. 하지만 이후 독립군은 뜻하지 않은 시련을 겪어야 했다. 독립군을 추격하다 오히려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에서 크게 패한 일본군이 이에 대한 보복으로 간도 일대의 한인을 무차별 학살하는 간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