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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장 │ 순국선 열 독 립 항쟁사 57 1920년 10월 독립군 부대는 독립군 토벌을 위하여 간도에 출병한 대규 모 일본군과 청산리에서 격전을 벌여 일본군 부대를 거의 전멸시켰다. 청산리대첩 승리 후 찍은 기념사진. 청산리대첩 기념비 동을 공격하고 나섰다. 봉오동은 험준한 산줄기가 사방으로 둘러쳐진 계곡 지대였다. 홍범도는 연합 부대를 재편성하여 일부 부대는 봉오동 밀림 속에 미리 매복시켜 놓고 나머지 부대를 직접 이끌고 일 본군을 깊숙한 계곡으로 유인하였다. 일본군이 포위망에 걸려들자 독립군 연합 부대는 즉시 공격을 퍼부어 큰 승리를 거두었다. 독립군 이 단 4명의 전사자를 낸 것에 비해 일본군은 157명의 전사자와 200여 명의 부상자를 냈으니 이는 대단한 압승이었다. 이것이 봉오동전투다. 봉오동전투는 뛰어난 예지력으로 작전을 지휘·통솔한 홍범도 장군과 지리적 요건을 활용한 허를 찌르는 작전, 열세인 병력에도 사기를 잃지 않은 병사들이 함께 이루어낸 합작품이었다. 봉오동전 투는 만주 지역을 무대로 독립군이 일본군 정규군을 크게 물리친 빛나는 전과로서 이후 벌어진 항일 투쟁에 불씨를 지폈다. 항일 독립전쟁사의 빛나는 전과 | 청산리대첩 북만주 일대에는 서일, 김좌진, 이장녕 등이 북로군정서를 조직하여 독립군을 양성하고 독립 항쟁을 벌였다. 독립군의 활발한 활동에 위기를 느낀 일본군은 다시 독립군을 소탕하기 위하여 1920년 10월 간도에 대규모 병력을 파견하였다. 이에 독립군 부대들은 대책을 논의하기 위하 여 한자리에 모였는데 북로군정서와 서로군정서 가 먼저 만나고 이어 홍범도 부대가 합류하였다. 북로군정서군의 병력은 약 1,600명이었고 대한 독립군, 국민회군, 의군부, 한민회, 광복단, 의민 단, 신민단 등이 연합한 홍범도 부대는 약 1,400 명 규모의 병력을 이루었다. 일본군과 싸울 것 이냐 피할 것이냐를 두고 설전이 오간 끝에 일단 피하기로 하고 병력을 후퇴시켰다. 그러던 중 일 본군의 추적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한 김좌진과 이범석은 각각 부대를 이끌고 청산리 울창한 계 곡 사이로 숨은 뒤 추격해온 일본군 부대에 사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