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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봉오동전투의 승전 소식이 실린 독립신문. 1920년 6월 봉오동전투에서 독립군에 참패 한 일본군 추격대가 패전경위에 대하여 그들의 상부에 보고한 기록 로군정서를 조직하였다. 3.1 만세 운동을 계기로 비폭력 항일 운동의 한계를 절감한 독립군 부대는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며 일 제 식민지 통치 기관을 습격하고 군자금을 모금하였으며 밀정을 처단하고 친일파를 숙청하는 등의 활동 을 하였다. 특히 독립군 부대는 주로 국경을 넘어 일본군 수비대를 기습 공격하는 작전을 펼쳐 큰 성 과를 얻었고 독립군의 활발한 국내 진공 활동에 시달린 일본군은 독립군 ‘토벌’에 안간힘을 썼지만 매번 패배의 쓴맛을 봤다. 이러한 무장 항쟁 가운데 가장 대표할만한 두 번의 전투가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이다. 독립전쟁에서 거둔 첫 번째 큰 승리 | 봉오동전투 대한독립군을 결성한 홍범도는 함경남도 갑산과 혜산으로 국내 진공 작전을 펼쳤고, 이후 독립군 무장 항쟁은 더욱 활기 를 띠었다. 홍범도는 효과적인 국내 진공 작전을 펼치기 위하 여 안무의 국민회군, 최진동의 군무도독부와 힘을 합쳐 독립 군 연합 부대인 대한북로독군부를 결성하였다. 1920년 6월 홍범도와 최진동이 이끄는 독립군은 함경북도 종 성군 강양동의 일본군 순찰소대를 기습 공격하였다. 독립군은 일본군 1개 소대를 격파하고 화룡현 삼둔자로 돌아왔다. 독립군 이 기습 공격한 사실을 안 일본군 39사단장은 곧바로 1개 대대 병력을 출동시켜 독립군을 추격하도록 하였다. 이를 미리 감지한 홍범도는 대한북로독군부를 이끌고 미리 삼 둔자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기습 공격하여 일본군을 완전히 격퇴 시켰다. 이 전투에서 독립군은 사살 120명, 중상 200명의 전과를 올리고 소총 160 자루, 기관총 3문을 빼앗았으니 이는 우리 독립군이 일본군과 본격적으로 벌인 최초의 대규모 전투이자 독립전쟁에서 거둔 첫 번째 큰 승리였다. 삼둔자 전투에서 대패한 일본군은 보복을 하기 위해 한반도와 시베리아에 주둔하고 있던 부대들을 총동원 한 대규모 추격대를 편성하여 독립군의 근거지인 봉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