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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의열단의 주요 투쟁 내용 인 물 시 기 투쟁 내용 소 속 박재혁 1920년 부산 경찰서에 폭탄 던짐 의열단 최수봉 1920년 밀양 경찰서에 폭탄 던짐 의열단 김익상 1921년 조선 총독부에 폭탄 던짐 의열단 김상옥 1923년 종로 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일경과 교전하여 여럿 사살 의열단 김지섭 1924년 일본 왕궁에 폭탄 던짐 의열단 나석주 1926년 동양 척식 주식회사와 조선 식산 은행에 폭탄을 던지고 일본인 사살 의열단 ■ 독립군 양성소 | 신흥무관학교 신민회가 국외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는 방안을 처음 검토한 때는 일제에 의 해 대한제국의 군대가 강제로 해산된 1907년이었다. 신민회는 해산당한 군인들이 참가한 의병 항쟁을 지지하였다. 의병 항쟁이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현대화된 군사훈련과 무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 고 , 무장투쟁을 통한 독립방책을 세웠다. 독립항쟁 거점 마련 │ 만주 유하현 삼원포 1909년 의병 항쟁이 점차 쇠퇴하면서 신민 회는 본격적으로 국외의 무관학교 및 독립군 기지의 설립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하였다. 그 러던 중 1909년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사건이 일어났고 안창호, 이동휘 등 신민회의 주요 간부들이 해당 사건과 관련 있 다는 혐의를 받아 구속되었다가 풀려났다. 신 민회는 다시 학교와 독립군 기지 건설에 박차 를 가하였고 1910년부터 이주를 시작하였다. 이를 알게 된 일제는 이를 방해하기 위하여 각종 사 건들을 날조하여 신민회원들을 대거 잡아들였다. 신민회가 해체되는 와중에도 신민회 회원인 이회영, 이동녕, 윤기섭, 김창환 등과 안동 혁심유림 인 이상룡, 김대락, 김동삼, 유인식 등이 만주와 연해주에 동포들의 거주 지역을 개척하고 항일 독립 항쟁거점을 마련하는데 성공하였다. 아울러 산업을 일으키고 자치 기구를 조직하여 사회·경제적 안정을 도모하는 한편, 민족 교육 기관을 설치하여 교육에 힘썼다. 신흥무관학교 야외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