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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1911년 9월, 105인 사건으로 인해 일본 경찰 에게 압송되는 신민회 회원들 의 필요성을 더욱 절실히 느꼈다. 이에 1920년대에는 독립군 기지를 중심으로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군사 훈련을 실시하여 군사력을 강화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국내 진공 작전을 활발히 펼쳤다. 이 때 조직된 대표적인 항일무장독립항쟁단체로 천마산대, 보합단, 구월산대가 있다. 1919년 최시흥 등 이 조직한 천마산대는 평안북도 의주에 위치한 천마산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군자금을 모집하고 일 제 경찰 및 친일주구 처단에 주력하다 만주로 이동하여 광복군총영에 통합되었다. 1920년 김동식 등이 평안북도 의주에서 조직한 보합단은 의주 동암산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일 제기관을 파괴하고 악질 친일밀정을 처단하는 활동을 활발히 하다 1923년 서로군정서·대한독립 단·광복군총영 등이 대한통군부를 결성할 때 함께 통합되었다. 구월산대는 1920년 이명서 등이 황 해도 신천에서 조직한 단체로 황해도 구월산을 중심으로 군자금 모금 활동과 독립항쟁을 방해하는 친일주구들을 처단하다 만주의 독립군에 합류하였다. 만주 항일 투쟁의 힘 | 신민회와 안동 혁신유림 독립항쟁가들이 만주와 연해주 일대로 건너오면서 이곳에서의 항일 투쟁은 더욱 활기를 띠었다. 국외 독립항쟁에 주도적으로 나선 이들은 신민회와 안동의 혁신유림이었다. 1907년 비밀리에 조직된 항일독립항쟁단체 신민회는 민중계몽, 국권회복, 실력양성을 목표로 국 내에서 교육구국운동, 계몽강연 및 서적·잡지 출판운동, 민족산업진흥운동 등을 주도하였다. 경술국치를 앞두고 일제의 항일 투쟁에 대한 감시와 탄압이 심해지면서 신민회는 국내 활동에 타 격을 입기 시작하였다. 안창호를 비롯하여 이갑, 이동휘, 신채호 등 신민회 주요 인사들은 1909년 미 국과 연해주, 만주 등지로 망명하였다. 1910년 신민회는 활동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국내외에서 각각 회의를 열고 독립전쟁론에 뜻을 함께 하기로 하였다. 무관학교 설립과 독립군기지 구축, 무장 독립 전쟁으로 활동방향을 바꾸었다. 그러나 국내에 남아 있던 신민 회 세력은 1911년 일제가 조작한 105인 사건으로 탄압을 받다가 결국 해체되고 말았다. 한편 1907년 협동학교를 설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