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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3월 1일에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만 세 운동은 3월 중순에는 평안도·황해 도·경기도 등의 도시로 확산되었고 3월 말에 이르자 전국으로 퍼졌다. 국외도 예외는 아니었다. 만주·연해 주·미국 등지에서도 만세 시위에 동참 하였다. 서간도의 삼원보와 북간도의 용정,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에서는 연일 우리나라의 독립을 요구하는 집회 와 시위가 벌어졌다. 미국에서는 대한 인국민회가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평화적인 시위에 일제가 무력으로 대응 하며 무참히 학살하자 일부 민중들은 일제의 통치 기관과 체포된 시위자가 갇힌 헌병 주재소, 경찰서 등을 공격하며 맞섰다. 그러나 군대를 앞세운 일제의 잔인한 탄압이 계속되면서 시위운동은 5월에 접어들자 점차 수그러들었다. 3.1 운동은 2달여 동안 독립을 원하는 수많은 이들이 참여하였고 그만큼 희생자도 많았다. 박은식 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전국 213개 군 가운데 203개 군에서 1,542회에 걸쳐 만세 시위 가 일어났고 시위운동에는 200만 명 이상이 참여하였다. 이 평화적인 만세시위를 일제는 폭력으로 진압하였다. 정규군 2개 사단(2만 3천 명)을 투입한 것도 모자라 4월에는 헌병과 보병을 추가 투입하였고 경고 없이 실탄 사격을 하 도록 지침을 내렸다. 만세 운동으로 7,509명 이 사망하였고 15,961명이 부상당하였으며 46,948명이 체포되었다. 또한 715호의 민가 와 47개소의 교회, 2개교의 학교가 불에 탔다. 그러나 이 통계는 만세 운동 발생 당시의 피해상황을 집계한 것으로 실제 피해자 수는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3.1 운동이 벌어지자 일본 경찰이 시위대를 진압하기 위하여 죽 늘어서있다. 기미독립선언서 1919년 3월 1일 만세 운동 때 민 족대표 33인이 작 성한 독립선언서 종로에서의 만세시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