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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1919년 2월 1일 만주와 러시아 지역에서 활동하던 조소앙, 박은식 등 독립항쟁지도자 39명은 조국 의 독립을 요구하며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독립 선언이며 음력으로 무오년에 선포되어 ‘무오독립선언’이라 부르기도 한다. 뒤이어 2월 8일 일본 도쿄에서도 우리나라 유학생들이 모여 독립 선언을 하고 선언서를 각국 대사 관과 조선 총독부, 일본 언론에 보냈다. 이를 ‘2.8 독립 선언’이라 한다. 일제의 방해로 강제 해산 당 하였으나 이 일은 곧 국내에 알려졌다. 일본의 중심부에서 학생들의 주도로 독립 선언이 이루어진 것은 독립항쟁지도자들에게도 상당한 충격이었다. 무오독립선언과 2.8 독립 선언은 곧 일어날 3.1 만세 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만세 항쟁의 지도자들은 독 립을 요구하는 대대적인 투쟁을 벌 이기로 계획을 세웠다. 천도교와 기 독교, 불교 등 종교계와 학생 단체 가 중심이 되어 독립운동을 준비하 였다. 당시 일제가 독립만세 운동 세 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모든 정치성 사회단체를 강제로 해산시켜버려 사 실상 국내에는 종교계와 학생 조직 만이 만세운동을 이끌 형편이었지만 독립 선언서를 작성하고 시위운동을 계획하는 등 독립 투쟁을 위한 준비 는 차질 없이 진행되었다. 그런 가운 데 1919년 1월 21일 고종황제가 갑작 스레 서거하였다. 건강하던 고종이 돌연 죽음을 맞이하자 사람들 사이 에는 일제의 독살에 의한 것이라는 소문이 돌아 사람들의 분노는 극에 달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죽 은 고종의 몸 색깔이 마치 독살 당하였을 때와 똑같았기 때문이다. 고종의 국상이 3월 3일로 정해지자, 만세운동지도자들은 이 때에 맞춰 대규모 민족 항쟁을 일으키 기로 계획하였다. 1919년 2월 1일 만주와 러시아 지역에서 활동하던 조소앙, 박은식 등 독립항쟁지도자 39명이 발표한 무오독립선언서 1919년 2월 8일 일본 유학생들 이 조선청년독 립단의 명의로 발표한 독립 선 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