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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한 실력 양성만을 최우선으로 여겨 의병 항쟁을 비난하거나 일부는 일제에 타협하여 친일 행위를 하기도 하였다. 애국계몽운동을 통하여 민족의 학력과 의식은 향상되었지만, 일제 지배 하에서 이루어진 까닭에 많은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애국계몽운동이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크게 일어나자 일제는 우 리 민족의 저항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하여 터무니없는 법을 만들어 모든 정치 운동을 금지하고 항일 운동을 거세게 탄압하였다. 특히 언론·출판·교육 활동 일체를 방 해하기 위하여 4가지 악법을 만들었다. 1907년에 신문지법을 만들어 사전 검열 을 통해서 신문의 발매 금지 및 차압, 발행 정지, 발행 금지 등을 할 수 있도록 하였는 데 이는 신문이 일제의 침탈에 비판적인 기 사를 쓰는 것을 사전에 막기 위함이었다. 뒤이어 보안법을 만들어 집회와 결사를 원천적으로 제한 및 금지하여 의병 항쟁과 계몽 운동 단체들의 항일운동을 봉쇄하고 탄압하였다. 1908년에는 학회령을 반포하여 학회 설립 시 허가를 받 도록 하여 학회의 정치적 활동을 일체 금지시켰다. 또한 1909년에는 출판법을 제정하여 사전 검열을 통 하여 일제의 식민 통치에 방해되는 출판물의 출판 및 배포를 금지하고 이를 위반하면 가혹한 처벌을 가하였 다. 심지어는 일제가 정한 악법을 지키며 공개적으로 활동한 단체에 대하여서도 탄압과 강제 해산을 자행하 였다. 일제의 식민 통치에 유리하게 만들어 놓은 악법 으로 인해 우리 민족은 실력을 기르고 민족의식을 높일 기회를 얻지 못하였으며, 다수의 단체와 학회들은 강제 해산 및 탄압을 받아 적극적인 계몽활동을 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신문지법 1907년 7월 27일자 관보. 일제는 사전 검열을 통해 신문을 통제함으 로서 조선인의 언론 자유를 제약하려는 의도를 분명히 드러냈다. 1907년 7월 29일 횡성신문에 개제된 신문지법 반포에 관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