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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장 │ 순국선 열 독 립 항쟁사 37 교육과 학문 연구의 자유 등을 주장하였다. 민중 대회와 순회강연 등을 통하여 민족 의식을 고취하 는데 앞장서는 한편, 노동 쟁의, 소작 쟁의 등 대중 운동도 지원하였다. 또한 광주 학생 항일 운동도 지원하였다. 신간회는 각 지역에 지회를 설립하는 한편, 일본과 만주에도 지회를 설립하며 국내외를 아우르는 규모로 발전하였다. 1930년에는 전국 140여 개의 지회와 4만 명에 달하는 회원을 확보하며 일제강 점기에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항일 운동 단체로 발전하였다. 하지만 일제의 극심한 탄압과 내부 이 념 갈등을 겪으며 조직된 지 4년 만에 해산하였다. 광주의 함성이 전국으로 | 광주 학생 항일 운동 6.10 만세 운동 이후 학생들은 더욱 투철한 항일 의식을 자각하고 항일 투쟁에 앞장서기 시작하였다. 학교 별로 독서회와 같은 비밀 결 사를 조직하여 식민지 교육 철폐를 주장하며 동맹 휴학 투쟁을 전개 하였다. 그러던 중 광주에서 한·일 학생들 간 충돌이 발생하였다. 통학 열차 안에서 일본인 중학교 남 학생들이 우리나라 고등학교 여학생들을 희롱한 것이다. 이를 목격한 여학생의 사촌 남동생은 불의를 참지 못하고 일본인 남학생을 한 대 쳤고, 곧 열차 안에 있던 두 나라 학생들 간의 싸움으로 번졌다. 사 건 이후 일제가 우리나라 학생들만 처벌하자 광주의 모든 학교 학생들은 각 학교의 비밀 결사를 중심 으로 항일 투쟁을 벌였다. 신간회 등의 지원을 받고 국민들의 참여가 더해지면서 곧 전국적인 규모의 항일 투쟁으로 발전하였다. 전국 대부분의 학교들이 시위를 하거나 동맹 휴학 운동을 전개하였다. 1929년 11월에 시작된 항일 투쟁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다음해 3월까지 계속되었다. 이 때 참 가한 학교가 194개교, 참가한 학생은 5만 4천여 명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만주와 일본에 있던 우리나라 학생들도 궐기에 참가하였다. 이로 인해 학생 2,330여 명이 유기정학을 당하고 580여 명이 퇴학과 함께 최고 5년형을 받았다.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을 알리는 호외. 중외일보 1930년 1월 1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