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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장 │ 순국선 열 독 립 항쟁사 33 ■ 국내 항일 투쟁의 본격적 전개 1907년 대한제국의 군대를 강제로 해산 시켜 대한제국의 방위력을 상실시킨 일제 는 경찰권과 사법권까지 빼앗으며 우리나 라를 식민지화하기 위한 음모를 구체적으 로 실행해 나갔다. 1910년 8월 22일 통감부 회의실에서 일제 통감 데라우치와 대한제 국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 사이의 은밀한 조 약이 맺어졌다. 그것은 대한제국이 일제에 통치권을 양여함을 규정한 경술국치조약 이었다. 이완용과 데라우치는 조인을 비밀에 부쳤다가 일주일 뒤인 1910년 8월 29일, 황제의 칙유와 함께 조약을 공포하였다. 이 때가 경술년이었다.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국권을 잃은 것이다. 경술 년에 나라가 국권을 빼앗긴 치욕을 당하였다하여 ‘경술국치(庚戌國恥)’라 하고, 이 날을 국치일이라 부른다. 일제는 우리나라의 국권을 침탈한 자신들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한일합방(韓日合 邦), 한일합병(韓日合倂) 등의 용어를 사용하였다. 일제는 조약을 공포함과 동시에 ‘한(韓)’이라는 국 호를 폐지하고 통감부 대신 조선총독부를 세워 초대 총독으로 데라우치를 임명하였다. 이 때 합방에 공을 세운 이완용 등 친일매국노 75명이 귀족 작위와 막대한 은사금을 받았으니, 그것은 나라를 팔 아먹은 대가였다. 조약 체결로 대한제국은 일제에 강제병합되었고 우리나라(대한제국)는 통치권을 완전히 잃어버린 35년간의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었다. 1910년대 국내 항일 운동은 유생 의병 계열의 복벽주의(復辟主義)와 애국 계몽 계열의 공화주의 (共和主義)로 크게 나뉘어 진행되었다. 복벽주의는 황제 복위 및 봉건 질서의 회복을 주장하였고, 공 화주의는 왕정 폐지와 국민 주권을 주장하였다. 이후 복벽주의는 사라지고 1920년대 들어서는 다시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로 나뉘었다. 민족주의자들은 실력 양성 운동을 전개하여 경제·문화 방면에서 민족의 근대적 역량을 배양함 으로써 국권을 회복하려 하였다. 이 과정에서 물산 장려 운동, 민립 대학 설립 운동 등을 전개하기 도 하였다. 하지만 일부 민족주의자들이 일제에 타협하자고 나서면서 타협 민족주의자들과 비타 협 민족주의자들로 나뉘었다. 비타협 민족주의자들은 조선 민흥회를 조직하여 민족 유일당 운동 한일 병합 조약시 전권위임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