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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장 │ 순국선 열 독 립 항쟁사 31 이며 이에 저항하였다. 경제적 구국 운동은 크게 국채 보상 운동, 방곡령 시행, 상권 수호 운동, 이권 수호 운동 그리고 황무지 개간 반대 운동 등 다섯 가지로 진행되었다. 비녀 팔고 담배 끊어 나라 빚 갚자 | 국채 보상 운동 1907년 2월 21일자 대한매일신보에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렸다. 이는 김광제와 서상돈이 발표한 국채 보상 운동 취지서였다. 국채 보상 운동은 한마디로 나라의 빚을 국민이 갚자는 운동이었다. 일제는 식민지 지배를 위한 전초 작업으로 각종 시설을 마련하고 화폐를 정리하는 사업을 벌였다. 그리고 대한제국이 일본에서 차관을 들여다 쓰도록 강요하였다. 대한제국을 일제의 경제적 예속 상태에 두려는 일제의 교묘한 술 책이었다. 이렇게 해서 대한제국이 일제에 진 빚이 1,300만 원에 달하였다. 이는 대한제국의 1년 예 산에 해당하는 실로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애국계몽 운동가들은 나라의 빚이 있는 한 일제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대 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의 후원으로 모금 운동은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졌다. 상인과 지식인층을 비롯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참여하였으며 모금 운동을 위한 수많은 단체들이 전국 각지에서 조직되었다. 김광제와 서상돈을 중심으로 단연회(담배 끊기 모임)가 조직되었고, 서울에서는 국 채보상기성회가 만들어졌다. 그야말로 범국민적 운동이었다. 남성들은 담배와 술을 끊어 모금에 참여하였으며, 여성들은 반찬값을 아끼는 것은 물론, 급한 일에 쓰기 위하여 장롱 속 깊숙이 숨 겨놨던 비녀와 반지 등의 패물을 팔았다. 여학생들은 머리카락을 잘라 모금액을 마련하기도 하 였다. 모금 운동은 전 국민의 열렬한 호응으로 몇 개월 새 모인 돈이 20여만 원이 넘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국채 보상 운동이 활발히 일어나자 당황한 일제는 국채 보상 운동을 노골적으로 방해하기 시작하 였다. 국채 보상 운동을 주도한 대한매일신보사 사장 베델과 양기탁이 모금액을 횡령하였다는 허위 소문까지 퍼뜨려 결국 국채 보상 운동은 중단되고 말았다. 하지만 국채 보상 운동은 일제의 국권 침 탈에 맞서 전 국민의 자발적 참여로 이루어진 민족 운동으로서 한민족의 단결력과 애국심을 일으켰 다는데 그 의의가 있다. 국채 1,300만 원은 바로 우리 대한제국의 존망에 직결되는 것으로, 갚지 못하면 나라가 망할 것인데, 국고로는 해결 할 도리가 없으므로 2천만 인민들이 3개월 동안 금연하고 그 대금으로 국채를 갚아 국가의 위기를 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