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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장 │ 순국선 열 , 의 숭고한 삶 303 총동원법을 조선에도 적용해 한민족 전체가 일제가 일으킨 태평양 전쟁에 휩싸였던 때다. 이 때 그가 쓴 ‘자화상’에는 전쟁에 광분한 일본 군국주의 속의 식민지 지식인이 겪어야 했던 고뇌 와 갈등이 짙게 배어 있다. 고뇌의 시기를 지나 졸업반이 된 1941년, 내적 방황과 역사의 무게를 시 로 승화시켰다. 그해 11월 윤동주는 그때까지 써놓은 시중에서 18편을 뽑고 여기에 서시를 붙여 「하 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의 시집을 엮었다. 그는 자신의 시집 원고를 3부 필사해 1부를 이양하 교수에게 줘 출판을 주선해달라고 했는데 교수 는 출판을 보류하라고 말했다. 일제의 검열을 통과할 수 없을뿐더러 신변의 위험도 있을 수 있다는 판단이었던 듯하다. 그래서 그의 첫 시집 출판은 해방 이후로 미루어지게 되었다. 일본유학 중 민족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투옥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 발발로 앞당겨진 학사일정에 따 라 연희전문 문과를 졸업한 윤동주는 1942년 3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릿쿄대학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하였다. 함께 일본 유학길에 오른 고종사촌 단짝 송몽규는 교토제국대 학 사학과에 입학했다. 유학 초기 윤동주는 이국땅에서 적잖이 향수병에 시달렸 다. 그래서인지 릿쿄대학에 진학한 지 한 학기만인 그해 10 월 윤동주는 단짝친구 송몽규가 있는 쿄토의 도지샤대학 영문과로 전입한다. 전시체제하의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도 윤동주는 도지샤 대학의 자유로운 학풍 을 호흡하고, 송몽규를 비롯한 벗들과 어울리며 한결 안정된 유학생활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러던 1943년 7월 윤동주는 방학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던 중에 송몽규 등과 함께 일 본 특고경찰에 체포됐다. 조선인 유학생을 모아놓고 조선의 독립과 민족문화의 수호를 선동했다는 죄목이었다. 특고경찰은 ‘재쿄토 조선인 학생 민 족주의 그룹사건’이라 이름 붙였다. 윤동주와 송몽규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각각 징역 2년의 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형무소로 이 감되었다. 그리고 1년 뒤인 1945년 2월 16일 생체 실험 때문이 아닌가 생각되는 원인 불명의 병으 로 윤동주 시인은 후쿠오카형무소에서 29세의 짧 지만 굵은 생을 마감했다. 윤동주 시인이 옥중에서 순국한 후 중국 길림성, 시인의 생가가 있는 곳 근처에 그의 유해를 안장하였다. 교토 우지강에서 있었던 윤동주 시인 송별회 사진, 현존 하는 윤동주의 마지막 사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