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3page

302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윤동주 시인의 ‘자화상’(좌)과 ‘서시’ 원고 윤동주의 어린 시절 이름은 해처럼 빛나라는 뜻의 해환(海煥)이었다. 윤동주의 동생은 달환(達煥), 갓난애 때 죽은 동생에게는 별환이라는 아명을 붙였다 윤동주라는 이름 석 자를 세상에 널리 알린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본인과 동생들의 이름에서 태어났다. 소학교 시절부터 시작된 시인 윤동주의 작품 세계 시인 윤동주는 1925년 만 8세 의 나이로 명동소학교에 입학했 다. 명동학교는 수많은 민족 지사 를 배출해 3.1 운동 이후 북간도 대한국민회가 조직되고, 국경선 일대의 봉오동·청산리 등지에서 치열한 독립전쟁이 벌어질 때도 명동학교 출신들이 활약했다. 서울에서 발행되던 「아이생활」, 「어린이」 등의 잡지를 구독하며 문학 소년의 꿈을 키우던 윤동주와 그의 친구들은 5학년 때에 손수 원고를 모아 새 명동이라는 잡지를 발 간하기도 했다. 1931년 3월, 명동소학교를 졸업한 윤동주는 중국인 소학교 6학년에 편입해 1년을 더 다녔다. 1931년 늦가을 윤동주의 집은 해란강 하류의 소도시 용정으로 이사했고 그는 은진중학교에 진학 했다. 이때부터 윤동주란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은진중학교에서 윤동주는 축구선수로 뛰기도 하고, 교내 잡지를 내느라 밤늦게까지 등사 글씨를 쓰기도 했다. 작품 활동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것도 이 무렵부터였다. 1935년 9월 숭실중학교 3학년에 편입한 윤동주는 객지생활 7개월 동안 시 10편, 동시 5편의 시를 쏟아냈다. 숭실중 학생청년회에서 발행하던 숭실활천에 실린 ‘공상’은 그의 시 가운데 최초로 활자화 된 작품이다. 고뇌와 역사의 무게를 시로 승화한 연희전문 시절 숭실중학교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신사참배 명령을 거부해 일어난 일들로 학교가 무기휴교 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용정으로 돌아온 윤동주는 광명학원 중학부 4학년에 편입했고, 졸업 후 고종사촌 송몽규와 함께 연희전문의 문과에 입학했다. 연희전문에서 윤동주는 민족문화의 소중함을 재확인했고 자신의 문학관을 정립해 나갔다. 윤동주 의 시 세계가 확립되어 갔지만, 동시에 참담한 민족 현실에 눈뜨는 과정이었다. 이때는 일제가 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