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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장 │ 순국선 열 , 의 숭고한 삶 299 공진회 회장으로서 매국단체인 일진회에 대항하다 유배되다 일제가 러일전쟁 승리로 제1차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고 내정간섭을 시작으로 침략을 자행 하자 반대 상소와 시위운동을 전개하는 데 주동적인 역할을 했다. 그의 절절한 웅변은 안창호, 이상 재 선생 등과 함께 사람들의 마음을 절절히 울렸다. 일제의 경제 침탈을 막던 보안회가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당하고 후속단체 성격을 가진 대한협동 회가 설립됐는데 이준 열사가 부회장을 맡아 일제의 황무지개척권을 무산시키는 공을 세운다. 일제가 송병준 등의 매국파를 중심으로 일진회를 조직해 매국활동을 시작하자, 이준 열사는 이에 대항하기 위해 공진회를 조직했다. 이 조직을 중심으로 반일진회 활동을 시작해 일제에게 요주의 인 물로 찍혀 황해도 황주로 유배됐다가 민영환 선생의 도움으로 석방될 수 있었다. 일제의 강압이 점점 강해지다 마침내 일본 헌병이 황실을 포위한 가운데 을사늑약이 채결되었다. 세계에 일제의 부당함을 호소하기 위해 상해에 가 있던 이준 열사는 이 소식과 함께 민영환 선생의 자결 소식을 듣고는 반드시 독립하겠다는 의지를 다지며 국내로 돌아왔다.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로 파견되다 이준 열사는 일제의 국권 침탈에 저항해 상소 운동, 청년 계몽 운동 등을 펼쳤지만, 일제의 무력진압 에 하루 이틀 만에 해결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인재가 있어야 나라를 구할 수 있다는 생각에 국민교육회를 조직해 초대 회장에 오르는 등 애국계몽 운동에 온 힘을 쏟았고, 사회 지도층과 함께 국 채보상운동에도 열렬히 나섰다. 1906년 특별검사로 재직하고 있던 이준 열사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개최 된다는 소식을 접한다. 전덕기, 이희영, 강석호 등의 도움을 받아 광무황제를 만날 수 있었다. 이준 열사는 그 자리에서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해 대한제국의 독립을 위해 열강의 지원을 요청하 자고 청한다. 광무황제는 이준 열사의 건의를 수용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보내기로 결정 한다. 헤이그 특사로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 부 사로는 전 평리원 검사 인 이준과 전 주아 공사 관 참서관 이위종을 임 명했다. 1907년 6월 15일부터 1개월간 개 최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