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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8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 대한민국장 │이 준(李儁) “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여, 을사조약이 황제의 의사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일제의 협박으로 강 제 로 체결된 조약이므로 무효라는 것을 세계만방에 알리고, 대한제국 독립에 관한 열국의 지원을 요청해야 합 니 다.” 광무황제는 이준 열사의 건의에 동감해 그를 헤이그 특사로 파견했다. 일찍이 최익현 선생으로부터 재사로 인정받은 인재 1859년 1월 21일 함경남도 북청군 속후면 용전리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준 열사가 세 살이 되 던 해인 1861년에 부모님이 돌아가시는 바람에 당시의 대학자이던 할아버지에게서 한학을 배우며 성장했다. 1875년에 서울로 올라와 형조판서인 김병시, 최익현 선생 등으로부터 재능이 뛰어나다며 큰 찬사를 받았다. 1884년 함경도시에 장원급제하고 1894년에는 함흥의 순릉참봉이 되었으나 갑오경장으로 개화당 내각이 수립되자 사직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1895년에 처음으로 설립된 법관양성소 소식을 듣고는 바로 입학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해 한성재판소 검사보로 법관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대관 중 신들의 비리를 들추어내기 시작하자 탐관오리들은 그를 중상모략하기 시작해 법관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제국주의의 위협이 지척에 달했는데 자신의 영달에만 신경을 쓰는 탐관오리들을 보고 실망한 이 준 의사는 독립을 위한 활동을 결심했다. 독립신문과 독립문 건설에 참여하고 만민공동회에서 한 연 설로 투옥됐고 그 후 비밀결사인 개혁당을 조직해 활동을 시작했다. 전 세계에 일제 만행 알리며 순국한 헤이그 특사 이상설, 이위종과 함께 네덜란드 헤이그의 만국평화회의의 특사로 파견되 어 일제의 부당한 침략을 규탄 ● 1859년 1월 21일 함경남도 북청 출생 ● 1896년 독립협회 평의원 ● 1904년 공진회 회장 ● 1906년 비밀결사 신민회조직 ● 1907년 7월 14일 헤이그에서 분사(憤死), 순국 ●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핵심공적 주요약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