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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6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1878년에는 선장이 자신의 친구가 경영하는 상사에 소개해 줬다. 선생은 상법을 공부하고 러시아어 를 습득하며 러시아의 상인으로 자라났다. 러시아 한인 사회를 위해 노력한 사업가 선생은 가출 10년 만에 가족들을 찾았다. 부친은 아직 도 농사를 짓고 있었다. 선생은 그동안 모은 돈으로 말, 젖소, 닭 등을 사고 새로 집을 지었다. 몇 년 후 러시아 정부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두만강 하구에 있는 크라스 노예셀로에 이르는 군용 도로를 건설한다. 당시 연해주 에서 러시아어와 조선어를 동시에 쓸 수 있었던 선생에 게 도로를 개축하도록 했다. 선생은 러시아 관리와 한인 간에 중재자 역할을 했는 데 한인의 입장을 잘 대변해 줘서 한인 사이에서 선생의 인기는 대단했다. 러시아 관리들도 그를 신뢰해 러시아 정부는 도로 건설의 공로로 은급 훈장을 수여한다. 1890년대에 들어와 러시아 정부는 1884년 이전에 이 주해온 한인들에게는 러시아국적을 부여하고 도헌, 사 헌제를 도입해 자치제를 허용했다. 1893년 선생은 러시아 이주 한인으로는 최초로 우리의 면장 또는 읍장에 해당하는 도헌에 선임됐다. 연추도헌으로서 선생이 중점을 두었던 사업은 한인자녀들을 위 한 교육이었다. 선생은 연추에 정교학교인 니콜라예프스코예 소학교를 세웠는데 한인마을에 세워진 대표적인 러시아식 한인학교였다. 선생의 지원으로 많은 교사와 장교들을 배출한 이 학교는 1899년 연해주 내 최우수 러시아소학교라는 평가를 받았다. 떠나온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다 러시아 사회에서 큰 성공을 거둔 선생은 떠나온 조국의 운명이 기울어지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러 일전쟁이 끝난 후 선생은 일본 동경으로 건너갔다. 일본의 한반도정책을 직접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6개월 만에 연추로 돌아온 선생은 곧바로 의병조직에 나섰다. 선생은 이범윤과 노보키예프스크에 의병본부를 설치했다. 안중근, 김기룡, 이범진 등과 함께 항일 조직인 동의회를 조직하고 총장에 선임됐다. 선생은 동의회의 군자금으로 1만3천 루블이란 거금을 쾌척했다. 1910년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형(왼쪽), 조카(가운데)와 기념 사진을 찍은 최재형 선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