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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장 │ 순국선 열 , 의 숭고한 삶 293 세계관을 갖게 된다. 당시 서울에선 독립협회의 자주·민권·자강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됐는데 신채호 선생은 독립 협회와 만민공동회의 문서부 간부로 활동했다. 그해 12월 25일,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가 강제 해산 되자 청원군에 있는 문동학원의 강사로 부임, 신교육을 통한 계몽운동을 시작했다. 언론계에서 활동하며 한민족 입장에서 역사를 저술하다 선생은 1905년 26세에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나 관직에 나아갈 뜻을 버리고 얼마 후 위암 장지연의 초빙으로 황성신문에 논설기자로 입사했다. 그러나 이해 11월 을사늑약으로 황성신문의 사장인 장 지연이 ‘시일야방성대곡’을 빌미로 황성신문은 무기정간 처분을 받았다. 1906년에는 ‘대한매일신보’의 논설진에 참가한다. 당시 ‘대한매일신보’의 공식적인 사주는 영국인 베델이었으므로 일제 통감부의 보안규칙이나 신문지법에 저촉을 받지 않아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있 었다. 얼마 후 이 신문의 주필이 됐으며 ‘독사신론’, ‘이순신전’, ‘최도통전’ 등의 역사물을 연재했다. 당시 문화계에는 존화사관에 젖은 중세유교사학이 일반적 경향이었다. 또 일본 사학자들은 근대 사학이란 이름으로 일본제국주의의 한국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조선이 고대 이래 중국과 일본에 복속했으며 가야에 임나일본부를 설치했다는 이야기를 지어냈다. 신채호 선생은 민족주의적 역사를 저술해 온 국민에게 읽히는 일이 가장 시급하고 중요함을 깨달 았다. ‘독사신론’에서 격렬한 필치로 존화주의에 젖은 중세사학과 일제의 거짓학설을 비판하면서 민 족주의에 입각한 자주적이며 실증적인 한국고대사 재구성에 노력했다. 망명길에 올라 독립항쟁에 힘쓰고 1910년 신민회 간부들은 국외에서 독립전쟁을 전개하기 로 했다. 신채호 선생은 동료와 함께 망명길에 올랐고 1911 년 12월에 블라디보스톡에서 권업회의 기관지 ‘권업신문’이 창간되자 신문의 주필로 취임했다. 1913년에는 박은식, 문일평 등과 함께 박달학원을 세워 중국에 있는 한국 청년들의 민족교육에 심혈을 기울이고 만 주 일대의 고구려와 발해의 유적을 답사하면서 민족사학의 실증적 토대를 더욱 발전시키는 계기를 갖게 됐다. 1918년 경부터 북경대학 이석증 교수의 주선으로 보타암에 자리를 잡고 한국사 연구를 계속했는데 이석증 교수와 동 대학 채원배 총장은 중국 무정부주의 초창자들이다. 이때부터 선생은 무정부주의에 대한 이관구에게 보낸 신채호 선생의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