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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2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 대통령장 │신채호(申采浩) 한(韓)나라 생각/ 나는 네 사랑 너는 내 사랑/ 두 사람 사이 칼로 썩 베면/ 고우나 고운 핏덩이가/ 줄 줄 줄 흘러 내 려오리니/ 한 주먹 덥썩 그 피를 쥐어/ 한(韓)나라 땅에 골고루 뿌리리/떨어지는 곳마다 꽃이 피어서 봄맞이 하리 -1910년 압록강을 건널 때 선생이 읊은 시 성균관 시절 개화자강과 민족운동에 관심 가져 신채호 선생은 충청남도 대덕의 도림마을에서 태어났다. 정언(定言)을 지낸 조부 신성우가 운영하던 사숙에서 한학을 교육받아 10살 때 행시를 짓고 12살 때 사서삼경을 독파하 여 신동 소리를 들었다. 18살 때 조부의 소개로 유학자이며 학부대신이었던 양원 신기선의 사저를 출입하면서 소장된 신·구 서적을 읽으며 새로운 학문을 깨우쳤다. 신기선은 동 도서기적 개화사상을 가진 정치가로 신채호 선생은 이곳에 서 개화에 대한 인식변화를 가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19살인 1898년 가을, 신기선의 추천으로 성균관에 입학한 선생은 그곳에서 백암 박은식이 주도한 진보적 유학경향을 접하며 기존 유학의 한계를 깨닫고 봉건유생의 틀에서 벗어나 점차 민족주의적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 진정한 민족주의자 언론가, 사학자, 독립항쟁가로 활동하며 민족사관을 수립하고 한국 근대사학 의 기초를 확립하는 동시에 일제에 대한 무장투쟁을 추진했다. ● 1880년 11월 7일 충청남도 대덕 출생 ● 1907년 신민회 가입 ● 1911년 권업회 조직, 권업신문 주필 ● 1919년 상해 임시정부 수립에 참가 ● 1923년 의열단의 조선혁명선언 작성 ● 1936년 2월 21일 10년 형을 받고 여순감옥에서 옥중 순국 ●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핵심공적 주요약력 신채호 선생과 부인 박자혜 선생 결혼기념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