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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8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나누어줄 태극기를 직접 만드는 등 만반의 준비를 했다. 아우내 장날, 열사는 장터 어귀에서 밤새 만든 태극기를 나누어 주면서 만세 시위운동에 참여하러 모여드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정오가 되자 장터 한가운데서의 연설을 해 사람들의 애 국심을 불태우고 이어 독립선언식을 거행했다. 열사를 필두로 3천여 명의 군중들은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기를 앞세우고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했다. 시위 대열이 아우내 장터 곳곳을 누비자 헌병들이 달려와 총검을 휘두르며 만 세 시위운동을 탄압하기 시작하여, 이 때 열사의 부친과 모친이 일본 헌병들에게 살해당하고 말았 다. 이에 열사의 숙부인 유중무와 함께 조인원, 조병호 부자, 김용이 등의 사람들이 열사의 부친 시 신을 둘러메고 병천 헌병주재소에 몰려가 항의 시위를 계속했다. 감옥에서도 꺾지 못했던 대한독립에 대한 의지 시위 군중들은 헌병들이 강탈했던 태극기를 도 로 빼앗아 항의했는데 이에 헌병들은 재차 무차별 총격을 가하여 시위 군중들을 해산시켰다. 그 후 유관순 열사와 유중무, 조인원, 조병호 부자 등 시 위 주동자들을 체포해 천안헌병대로 압송했다. 열사는 천안헌병대에서 갖은 고문을 받으면서 도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이 시위 주동자라고 말 하면서 죄 없는 다른 사람들을 석방하라고 호통 치기까지 했다. 공주감옥으로 이송된 열사는 공 주 영명학교에서 만세 시위운동을 주도하다가 잡혀 온 오빠 유관옥을 만나게 된다. 법정에선 열사는 기개를 잃지 않고 “나는 한국 사람이다. 너희는 우리 땅에 와서 우리 동포들을 수 없이 죽이고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였으니 죄를 지은 자는 바로 너희다”라고 호통치며 일제의 재판을 거부했다. 유관순 열사는 공주재판소에서 5년 형을 받고 항소하여 서울복심법원에서 3년형 으로 감형되었다. 유관순 열사는 감옥 안에서의 온갖 탄압과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아침저녁으로 만세를 불렀다. 3.1 운동 1주년을 맞이해서 수감 중인 동지들과 함께 대대적인 옥중 만세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서대 문감옥 지하 감방에서 무자비한 고문을 당한 끝에 결국 1920년 9월 28일, 18살의 꽃다운 나이로 순 국하고 말았다. 유관순 열사의 수감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