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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장 │ 순국선 열 , 의 숭고한 삶 287 할 수 있었고, 또 먼저 입학한 사촌 언니 유예도의 주선으로 금세 선·후배들과 친 해질 수 있었다. 1918년 1월 8일 제1차 세계대전이 막바 지에 이른 연합국 측을 대표한 미국 대통 령 윌슨이 전후 처리 지침으로서 민족자 결주의 원칙을 천명했다. 그해 11월 11일 제1차 세계대전이 공식적으로 종전되고, 다음 해 1월부터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개 최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독립을 염원하는 사람들은 이 기회를 그냥 넘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 3월 1일에 울려 퍼진 대한독립만세 중국 상해에서는 신한청년당, 일본 동경에서는 조선유학생학우회를 중심으로 국내외 동포들은 한 국 민족이 대동단결하여 민족독립을 요구하면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우리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고 하는 기대감 속에서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계획하고 추진했다. 국내에서도 거족적인 독립운동이 전개돼 천도교, 기독교, 불교, 학생이 참여한 민족대연합전선이 구축됐다. 민족대표들은 같은 행동을 취하고 일제에 체포되더라도 그동안의 경과를 정정당당히 밝 힐 것 등을 결의했다. 유관순 열사는 3.1 운동 추진 계획을 이화학당 내의 비밀결사인 이문회 선배들을 통해 듣고 있었 다. 그래서 열사는 3.1 운동이 일어나기 전날 동기들과 시위 결사대를 조직, 만세시위에 참가하기로 맹세했다. 드디어 3월 1일 탑골공원을 나온 만세 시위대가 학교 앞을 지나자 프라이 교장의 만류를 뿌리치고 뒷담을 넘어 시위운동에 동참했다. 일제는 학생들이 3.1 운동에 대거 참여하고 학교가 만세 시위운동의 추진 기지가 되자 3월 10일 중 등학교 이상의 학교에 대한 임시휴교령을 내렸다. 학교가 문을 닫자 열사는 고향에서 만세 시위운동 을 실행하기로 마음먹고 집으로 돌아간다. 아우내 장터에서 울려 퍼진 대한독립만세 집에 온 유관순 열사는 동네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서울의 3.1 운동 소식을 전하고 만세 시위운동의 필요성을 설득했다. 부친의 주선으로 조인원과 이백하 등 20여 명의 동네 유지들과 상의해 4월 1일 (음력 3월 1일) 아우내 장날 정오에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고 거사 당일에 사람들에게 유관순 열사의 이화학당 시절, 뒷줄 오른쪽 제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