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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장 │ 순국선 열 , 의 숭고한 삶 283 ▒ 대통령장│양한묵(梁漢黙 ) 반드시 되리라는 생각은 없어도 독립을 계획하는 것은 조선인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지금 강화회의에서도 민 족 자결이 제창됨으로써 일본정부의 원조로 자립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금번의 독립항쟁을 한 것이고, 금후도 기 회 만 있다면 할 생각이다. -경성지방법원 예심괘의 심문조서 중 다양한 종교에 관심이 많았던 향반의 자제 양한묵 선생은 1862년 음력 4월 29일 전라남도 해남에서 태어났다. 선생의 집안은 문과 급제자를 다수 배출한 양반 명문가였다. 그러나 선생의 12대조가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11대 조부터 벼슬길이 막히고 말아 가까운 조상이 벼슬길에 나간 사람은 없지만, 향반으로 대접받던 집안의 장남이었다. 조상들이 관개 수리사업을 벌여 부를 축적했고 아버지 대에는 집안에 상당한 숫자의 노비를 거느 릴 수 있는 경제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지역사회 활동과 선행으로 주변 농민들로부터 존경을 받 고 있어 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 양한묵 선생의 집안이 피해를 입지 않을 수 있었다. 선생은 일곱 살 때 어머니에게서 천자문을 배우고, 여덟 살 때는 양사재에 들어가 유학을 배웠다. 15살 때는 상서와 춘추 등 유가의 여러 서적을 섭렵하고 18세 때 불교, 선교, 천주교, 신교, 음양복술 에 관한 서적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이후 능주목(현 화순군)으로 이사해 학생을 교육하면서 생활했다. 시간이 나면 동쪽의 금강산, 서 쪽의 구월산, 남쪽의 지리산, 북쪽의 묘향산 등의 명산대찰을 둘러보며 일본과 서구 열강의 침략으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유일한 옥중 순국자 3.1 운동을 진행하고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의 한 명 ● 1862년 4월 29일(음) 전라남도 해남 출생 ● 1905년 ‘헌정연구회’를 조직해 친일세력에 대항 ● 1909년 천도교총부 법도사, 1911년 직무도사 역임 ● 1919년 3.1 운동 민족대표 33인으로 활약하다 체포 ● 1919년 5월 26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사, 순국 ●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핵심공적 주요약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