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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장 │ 순국선 열 , 의 숭고한 삶 279 에 특사를 보내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알리려고 했으나, 일제는 헤이그 특사 사건에 대한 책임을 물 어 광무황제를 퇴위시키게 된다. 광무황제는 1907년 7월 19일 “군국(軍國)의 대사를 황태자로 하여금 대리하게 한다”는 양위조칙을 발표하기로 한다. 대한제국 황실의 근위부대인 시위대 지휘관들은 7월 19일 새벽을 기하여 경운궁 으로 진주하여 광무황제를 호위함으로써 일제의 퇴위 공작을 무산시키려 했지만, 친일 군부대신 이 병무가 일본군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에게 알리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다. 이날 오후 광무황제의 양위가 확정되자 시위대 장병들은 병영을 이탈하여 격렬하게 반대시위를 전개하던 일반 군중과 합세하여 종로의 순사파출소를 습격하고 일본군경을 공격하는 등, 반일 무장 투쟁을 전개했다. 의병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킨 기폭제가 되다 광무황제의 퇴위 문제로 발생한 대한제국 군대의 반일적 동향과 시위대 장병들의 무장투쟁에 큰 위협을 느낀 일제는 한국을 완전 식민지화하기 위해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하기로 한다. 7월 24일 정 미7조약을 체결하게 하면서 대한제국 군대 해산하기 위한 비밀각서를 교환했다. 8월 1일 아침 7시 군부대신 이병무는 각 연대장과 대대장 및 기병, 포병, 공병대장 등을 일본군사 령관 하세가와의 관저인 대관정으로 소집하라고 명령했다. 박승환 선생은 병을 핑계로 중대장인 김 재흡을 대리 참석시켰는데 부대로 돌아온 김재흡 중대장의 보고를 통해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 사실 을 알게 됐다. 비통함을 이기지 못하여 대성통곡하고 ‘대한제국만세’를 외친 다음 차고 있던 권총으 로 자결, 순국했다. 선생의 순국 사실을 들은 휘하의 시위 제1연대 제1대대 장병들은 일제히 대대장과 함께 죽을 것을 맹세하고 봉기하여 반일 무장투쟁을 개시했고 이에 호응한 다른 시위대의 병사들과 합세해 남대문 전투가 벌어졌다. 이후 상당수의 시위대 병사가 의병운동에 투신하게 된 직접적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의병운동을 전국적인 국민운동으로 확산시킨 기폭제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