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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8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지키고자 결심했다. 당시 무관 양성기관으로 훈련대사관양성소 가 있었는데 주한 일본공사 이노우에 카오루 의 건의에 따라 만들어져 일본군 교관에 의해 조종되고 훈련되어 친일적 성향을 강하게 가 진 곳이었다. 간부와 일부 병사들이 명성황후 살해 사건에 관련돼 훈련대사관양성소도 폐 교됐다. 이후 새로운 장교 양성기관으로 일제 의 영향이 배제된 무관학교가 설립됐는데 선 생은 여기에 지원했다. 대한제국 황제를 지키는 부대의 지휘자 박승환 선생이 무관학교에 입학한 때는 1896년 9월 28일이었다. 당시 무관학교 교장은 이학균 참 령으로 1888년 개설된 사관양성소인 연무공원의 미국인 군사고문 다이 장군의 조교로 활동한 이래 그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강렬한 반일 민족의식을 가지고 있던 인물이다. 박승환 선생은 약 6개월간 초급 장교로서 필요한 근대적인 군사교육을 수료한 뒤, 1897년 3월 21일, 육군 보병 참위(현 소위)로 임관했다. 광무황제는 1897년 2월 경운궁으로 환궁한 뒤 궁궐 내에 상주 하는 경호부대인 숙위를 강화하기 위해 3월 16일 시위대로 재편했는데, 선생은 정예화된 황실 근위 부대인 시위 제1연대 제1대대 장교로 선발 배치됐다. 이후 1899년 11월 11일 육군 부위(현 중위)로 진급해 시위 제1연대 제2대대 소대장으로 보임됐다. 그리고 1900년 7월 23일에는 육군 정위(현 대위)로 승진해 친위 제1연대 제1대대 중대장으로 전임되 었다가, 같은 해 8월 14일 다시 시위 제1연대 제1대대 중대장으로 임명됐다. 1904년 2월 15일 선생은 육군 참령으로 진급해 시위 제1연대 제1대대장의 중임을 맡게 됐다. 광무황제 퇴위로 시작된 반일 무장투쟁 이 시기 일제는 1904년 2월 23일에는 대한제국 정부를 강박하여 “대한제국 내에서 군사적으로 필 요한 긴급조치와 군사상 필요한 지점을 임의로 수용”할 수 있도록 하는 한일의정서를 체결하게 해 본격적인 한국 식민지화 정책을 감행했다. 같은 해 8월 22일에는 제1차 한일협약을 강제해 우리나라의 외교권과 재정권을 장악했고 마침내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을 체결하게 함으로써 한국을 사실상 식민지화했다. 광무황제는 헤이그 군인들은 군복과 견장 그리고 패검 佩劍을 빼앗기고 강제해산을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