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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6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끝까지 절개를 지키고자 했던 조선의 선비 연일 상소항쟁을 계속했으나 아 무런 회답도 받지 못했고 일본 헌병 에게 끌려 나갔음에도 다시 돌아와 표훈원에서 상소운동을 시작했다. 결국, 일본 헌병들이 달려와 그를 친척 조민희의 집으로 끌고 갔다. 이제 더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 음을 알게 된 조병세 선생은 자결 을 결심하고 유서와 각국 공사에게 보내는 편지, 그리고 국민에게 당 부하는 글을 남기고 미리 준비한 극약을 마셨다. 일본 헌병은 당황 하여 의사를 불렀으나 사위인 이용 직이 호통을 치며 내쫓았다. 이때 조병세 선생의 나이 79세였다. 조병세 선생의 자결은 사람들 사이에 알려졌고 그의 유서는 대한 매일신보에 게재되었고 ‘독(讀) 조 병세 유서’라는 제목의 논설에서는 “한마디 한 글자가 사람들로 하여 금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게 한다” 고 선생의 죽음을 애도했다. 선생은 평소 주위 사람들에게 “사람이 가장 하기 어려운 것이 끝까지 절개를 지키는 일이다. 끝까 지 절개를 지켰던 분은 포은 정몽주였다”고 말해왔던 것을 몸소 실천했던 것이다. 을사늑약 무효를 주장하며 결고국중사민서(訣告國中士民書)를 남기고 순국한 조병세 선생의 묘 경기도 가평에 위치한 삼충단. 이곳은 구한말 일본의 침략에 항거한 조병세ㆍ최익현ㆍ민영 환 세분의 고귀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만든 제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