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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장 │ 순국선 열 , 의 숭고한 삶 275 는 사람이 가져야 할 도리와 예의에 있다고 봤다. 부국강병의 근원은 개혁이라 설파하다 1884년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나고 10년간 조병세 선생은 외세의 간섭에 맞서 부국강병을 통한 자 주적 국권수호에 힘썼다. 하지만 당시의 권력은 민씨 세력에게 장악되어 있었고 부정부패가 만연하 여 백성들의 생활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처참해 민란이 끊이지 않았다. 조병세 선생은 매관매직 등의 부정으로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기 어려워 기인론을 주장하면서 인 재 선발 과정의 공정성 확보를 위해 헌책과를 신설하자고 주장해 고종의 허가를 받았으나 민씨 세력 의 반대로 시작조차 하지 못했다. 정부의 무능과 부패로 쌓인 불만은 동학농민운동으로 폭발하고야 말았다. 대책 마련을 위한 어전 회의에서 조병세 선생은 “오늘의 민정을 살펴보면 매우 가련하기 짝이 없 습니다. 가령 4칸의 초가집은 1년의 납세가 백여 금이고, 5~6두락의 토지에는 1년 납세액이 너무 많 아 호구조차 잇지 못할 정도로 빈궁이 극심합니다. 만약 대경장을 크게 시행하지 않으면 실효가 없 을 것입니다”라며 근본적인 원인을 고치지 않으면 소용이 없음을 지적했다. 고종은 독자적인 내정 개혁을 추진하기로 결정하고 농민운동의 수습과 정부기구 혁신을 통해서 교정청을 신설하고 조병세 선생이 참여했으나 실권은 하나도 없는 자문기구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결국 일제의 힘을 얻은 세력에 의한 갑오개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말았다. 진심을 담은 상소도 망국의 흐름을 막지 못하고 갑오개혁과 을미사변을 거치면서 일본의 침탈은 점점 강해졌다. 일제를 몰아내기 위한 의병항쟁 이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조병세 선생은 19개 조의 개혁을 건의했다. 그러나 외세의 간섭 속에서 자 주적 외교와 부국강병을 하지 못하고 일본과 러시아 등에게 각종 이권을 내줬고 결국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강압으로 외교권을 빼앗기고 말았다. 다시 조병세 선생은 79세의 몸을 이끌고 시폐 5조 상소를 광무황제에게 올려 개혁의 필요성을 강 조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1905년 11월 17일 한국의 외무대신 박제순과 일본의 특명 전권공사 임권조(林權助) 사이에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말았다. 을사늑약 소식을 접한 선생은 “나라 가 이미 망하였으니 내 세신(世臣)으로서 따라 죽음이 마땅하다”는 각오로 민영환, 이상설 등을 이끌 고 입궐해 상소를 올렸다. 일본공사 임권조에게 군대를 동원하여 강제로 조약을 체결한 사실의 부당 성을 꾸짖고 조약의 폐기를 요구하였다. 또한, 영국·독일·미국·프랑스·이태리 등 5개국의 공사 들에게 공문을 보내 국제공법에 따라 합동회의를 열어 늑약을 부인하는 성명을 낼 것을 호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