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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장 │ 순국선 열 , 의 숭고한 삶 273 한제국 정부에게 한일의정서를 체결케 하면서 본격적인 한국 식민지화 정책을 시작했다. 을사늑약의 항거로 자결. 독립항쟁의 기폭제가 되다 일제는 미국과의 카츠라 태프트 밀약, 영국과의 제2차 영일동맹, 그 리고 러시아와의 강화조약인 포츠머드 조약 등 제국주의 국가들 간 의 일련의 거래를 통해 한국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공인받았다. 일 제가 침략정책을 자행하자 민영환 선생은 격렬하게 비판했다. 하지만 그 일로 일제와 친일 각료들의 배척을 받아 한직인 시종무관장으로 밀 려나고 말았다. 결국, 일제는 대한제국 정부의 각료들을 총칼로 협박하여 1905년 11 월 17일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함으로써 국권을 강탈했다. 민영환 선생 은 을사늑약이 체결되던 때에 부인의 산소를 이장하는 일로 경기도 용 인에 내려가 있다가 소식을 들었다. 소식을 듣고 바로 서울로 올라와 원임 의정대신 조병세 그리고 다른 관료들과 함께 을사늑약에 서명한 이완용 등 매국 대신들을 처형하고 조약을 파기하도록 상소했다. 선생을 비롯한 관료의 상소로 조약 체결에 대한 반대 여론은 더욱 고 조됐다. 일제는 일본 헌병을 출동시켜 민영환 선생과 조병세를 감옥에 가뒀다. 평리원 감옥에 갇혀 있다가 석방된 후 기울어진 대세를 바로잡을 길이 없음을 개탄했다. 11월 30일 오전 6시경, 2천만 동포와 각국 공사에게 보내는 유서 2통을 남기고 품고 있던 단도로 목을 찔러 자 결 순국했다. 그의 나이 45세였다. 민영환 선생의 죽음과 유서는 각 신문에 상세하게 보도되어 온 국민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후 일제 침략에 대한 강력한 투쟁 방략의 하나로 의열투쟁이 자리 잡았고 국권회복을 위한 의병운동과 구국 계 몽운동이 발흥하는 기폭제가 됐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선생이 명함에 쓴 유서(1905년). 2천만 동포에게 보내는 유언을 적고 있다. 민영환 선생이 공주부 관찰사에게 보낸 간찰 (1904년 5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