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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장 │ 순국선 열 , 의 숭고한 삶 261 공동조계에 있는 육삼정이란 고급 요리점에서 개최된다는 정보를 입수한다. 흑색공포단은 그 대책 을 세우는 한편 육삼정을 습격해 일본 주중 대사 등을 처단하기로 결정했다. 흑색공포단의 단원들 모두가 이 기회가 독립항쟁가로서 뜻깊은 죽음의 기회라 생각해 서로 하려 고 했다. 첫날 회의에서는 실행할 사람을 결정하지 못해 다음날 다시 모여 추첨으로 결정했다. 결정 된 두 사람이 백정기 의사와 이강훈이었다. 상해 육삼정에서 주중 일본공사 등을 처단하기로 결정 원심창은 적의 동정과 현장의 조사 등을 맡기로 하 고 유자명, 오면직, 정화암 등은 거사일인 17일까지 은밀히 철저한 준비를 서둘렀다. 무기는 윤봉길 의사 가 사용한 것과 똑같은 대형폭탄을 선택했다. 폭탄 2 개를 비롯해 권총 2자루와 탄환 20발 수류탄도 1개 더 준비했다. 거사일인 3월 17일 오후 6시 진진다관에서 차를 마신 두 의사는 유자명, 오면직에게 죽어 저승에서 만나자고 마지막 작별인사를 한 후 육삼정으로 갔다. 의사는 현 장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일본인을 만나기로 계획되어 있었는데 아나키스트라던 그 일본인을 믿은 것이 실수 였다. 거사는 이미 알려져 일본 형사들이 인력거꾼, 식당의 종업원 등으로 변장해 잠복하고 있었다. 동지들은 손 쓸 새도 없이 붙잡혀 거사를 이루지 못했다. 거사는 이 루지 못했지만 육삼정 사건은 일제의 대륙침략음모를 폭로시켜 중국인들의 항일의식에 큰 영향을 줬다. 의사는 곧 일본 나가사키로 압송됐다. 양일동, 최학 주, 정찬진 등의 사람이 변호사를 구하고 구원운동을 폈으나 나가사키 법원은 의사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 다. 의사는 옥고 중 1934년 6월 5일 39세의 나이 옥중에서 순국했다. 의사의 유해는 일본에 묻혔다 가 광복 후 1년 만인 1946년 7월 6일 이봉창, 윤봉길 두 의사의 유해와 함께 조국으로 돌아와 효창원 에 안장됐다. 백정기 의사(위쪽 사진)가 의거 현장에서 소지했던 도시락 폭 탄과 권총. 앞쪽에 손으로 만든 듯한 줄과 손잡이가 점화장치 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