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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평화 운동에서 적극적 항일투쟁으로 만세항쟁은 일제의 강한 탄압으로 사람들이 죽고 다 쳐 5월이 되면서 진정세로 돌아섰다. 의사는 만세항쟁 으로는 독립을 이루지 못한다는 생각에 무장 투쟁을 결 심하고 그해 8월 동료들과 함께 다시 서울로 왔다. 서울 과 인천 등지에서 일제 기관의 파괴, 방화와 침략원흉 의 처단 등의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계획하였으나 사전 에 일본 경찰에게 발각됐다. 국내에서보단 국외에서 활동할 결심을 하고 수색, 신의주를 거쳐 안동(현 단동역)에 도착했다. 시 내에는 영국인 죠지 엘 쇼(gorge l. show)가 경영하는 무역상 대리점 2층에 임시정부 교통부 산하 안 동 교통지부가 설치되어 있었다. 의사는 조지 엘 쇼를 찾아가 그의 알선으로 봉천(현 심양)에 갔으며 그곳에서 이강훈을 만났다. 1920년에는 서울로 돌아와 군자금모집 활동을 하던 중 수상히 여긴 일본 경찰의 불심검문으로 잡혀 갔으나 가명을 대고 행적을 속여 위기를 면할 수 있었다. 의사는 일제의 세력권인 국내에서는 항일활동은 어렵다고 생각해 북경으로 떠났다. 이때 이회영, 신채호 등과 만나 그 영향으로 의사는 무정부주의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농촌사회 건설에 참여했다. 파괴 암살을 목적으로 하는 흑색공포단 조직 북경에 도착한 의사는 보다 적극적으로 독립항쟁을 전개 하고자 동료들과 함께 재중국 조선무정부주의연맹을 결성 했다. 이곳에서의 활동으로 10만여 명 단위의 대노동자조 합을 결성하고 농민자위군을 조직해 농촌계몽과 조직화에 힘쓰고 농민자치운동을 전개했다. 제1차 상해사변이 일어나자 동료들과 함께 파괴, 암살을 목적으로 하는 흑색공포단이라는 행동대를 조직하여 일제 기관 파괴와 침략원흉의 처단을 실행했다. 이들의 행동이 점점 활발해지자 일본 군경은 근거지를 찾으려고 사람들을 회유하고 밀정을 투입했다. 1933년 3월 일본 군벌이 주중공사 유명길에게 거액을 줘 중국 국민정부의 고위 장성을 매수하려는 비밀회의가 상해 백정기 선생의 의열투쟁에 관련된 신문기사 (『동아일보』, 1933년 7월 12일) 백정기 선생 친필 서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