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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장 │ 순국선 열 독 립 항쟁사 25 을 세웠으나 국권을 강탈한 일제의 방해로 무산되고 말았다. 1915년 이후 의병항쟁은 독립군 활동으 로 이어져 계속 전개되었다. ■ 의병항쟁의 의의 세 차례에 걸친 의병 항쟁은 활동 범위가 전국적이었고, 참여 계층 역시 광범위한 범 민족적 항일 투쟁이었다. 그러나 일제 정규 군대의 막강한 군사력을 제압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초기 봉건적 지 배질서를 고집한 양반 유생층의 지도 노선으로 결속을 강화하지 못한 점도 있었다. 게다가 외교권 상실로 국제적으로 고립된 상태였기에 국제적 지원을 받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의병항쟁은 나라와 민족이 위기에 처하였을 때 우리 민족이 자발적으로 일으킨 애국 운동 의 대표적 형태로서 우리 민족의 강인한 저 항 정신을 표출한 항일 민족 투쟁임은 분명 하였다. 의병 항쟁은 3.1 만세 운동과 대한민국 임 시정부 수립을 비롯한 수많은 국내외 독립 항쟁의 정신적 토대가 되었다. 약 30만여 명의 의병 가운데 순국하신 분이 10만여 명 에 달하여 독립항쟁 중 가장 많은 피해를 낳 았다. 국권 회복을 위하여 헌신한 의병은 훗 날 독립군과 광복군으로 이어졌다. 을사조약이 강제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어 일제에 저항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일제의 식민 통치에 경종을 울리고 한 민족에게 민족적 각성을 촉구하여 항일 투쟁을 지속하기 위함이었다. 주로 세 차례에 걸쳐 일어났는데 첫번째는 을 사조약 강제 때이고, 두번째는 국권을 빼앗긴 경술국치 때이며, 세 번째는 1919년 고종의 죽음이었다. 전국에서 90여 명의 인사들이 자정순국(自靖殉國)의 길을 택하였다. 특히 안동지방에서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10명 의 자결 순국자가 나왔다. 이는 의(義)를 중시한 안동유림들의 결연한 인식을 보여주는 한 예다. 안동 유림들은 대부 분 단식의 방법으로 순국하였다. 자정순국이란? 의병 항쟁은 전국적이고 범 민족적인 항일 투쟁이었으며, 이후 수많은 독립항 쟁의 정신적 토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