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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장 │ 순국선 열 , 의 숭고한 삶 257 박상진 선생은 스승 허위의 시신을 수습해 고향인 경상북도 선산군으로 모셔 장사 지낸 후, 1년간 상을 지냈다. 1910년 판사 시험에 합격해 평양법원에 발령받았으나 경술국치로 우리나라가 일제의 식민지가 되자 판사직을 거절한다. 중국 신해혁명을 보며 국내 혁명을 계획하다 1911년 망국의 설움을 안고 고국을 떠난 선생은 중 국 만주를 여행하면서 허위의 형인 허겸과 손일민, 김 대락, 이상용, 김동삼 등 독립항쟁가들을 만나 투쟁 방법을 논의했다. 이 때 중국에서 신해혁명이 일어나 는 것을 직접 본 선생은 우리나라에서도 혁명의 필요 성을 절감했다. 이후 중국혁명을 배워야 우리나라에서도 혁명을 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신해혁명기에 선생은 중국을 여 행하면서 그동안 배웠던 신학문과 이때의 경험이 합 해져 군주제와 신분제의 사고방식을 완전히 떨쳐낼 수 있었고 대한광복회 조직으로 이어지게 된다. 1912년 귀국한 선생은 독립항쟁의 재정 지원과 정보 연락을 위해 대구에 상덕태상회란 이름의 곡물상회를 세운다. 당시 상덕태상회는 국내의 연락뿐 아니라 만 주 안동의 삼달양행이나 장춘의 상원양행 등 곡물상 과 연락망을 구축하며 독립항쟁의 거점이 됐다. 그러던 중 선생은 1915년 1월 15일 대구 안일암에서 계몽운동과 독립항쟁을 벌이는 단체로 결성된 조선국권회복단에 참여했다. 한편으로 선생과 정운일, 김재열 등 이 단체의 의병 계열 인사들은 일 제를 이 땅에서 몰아내려 지역단위의 독립항쟁만으로는 어렵다고 생각하고 더욱 강력한 혁명적 독 립항쟁단체의 조직을 구상했다. 1915년 7월 15일, 대구에서 대한광복회를 조직 일제에 의한 토지조사사업은 농민의 권리를 부정하면서 지주 위주로 시행해 지주층은 식민통치 체제가 자신들의 경제력을 유지하고 확대하는 데는 나쁘지 않다고 인식하게 만들었다. 이런 인식 변 화는 독립항쟁단체에도 영향을 끼쳐 군자금 모금이 어려워지게 됐다. 박상진 의사 생가 앞 고헌 박상진 의사 기념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