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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장 │ 순국선 열 , 의 숭고한 삶 255 은, 이응삼 세 사람은 거사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고, 조창호와 전태선은 거사에 필요한 권총 및 단 도를 준비하여 서울로 운반하는 책임, 그리고 김용문은 먼저 서울로 올라가서 이완용과 이용구의 동 정을 탐지하기로 했다. 그러던 중, 이완용을 비롯한 역적들이 12월 22일 오전 종현 천주교당(명동성당)에서 벨기에 황제 의 추도식에 참석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드디어 12월 22일 오전 11시 선생은 성당 문밖에서 군 밤장수로 변장하고 기다리고 있다가 매국노 이완용을 공격했다. 민족의 공적 이완용을 칼로 찌르다 이재명 선생은 이완용이 인력거를 타고 앞으로 지나갈 때 비수를 들고 달려들었다. 이를 제지하 려는 박원문을 한칼에 찔러 거꾸러뜨리고 이어 이 완용의 허리를 찔렀다. 선생의 공격에 혼비백산한 이완용이 도망가려 하자 다시 어깨 등 3곳을 더 찔 렀다. 거사 직후 “나는 모든 동포를 구하기 위하여 이 거사를 행하였다. 그런데 그대들은 어찌 방관만 하느냐. 오늘 우리의 공적을 죽였으니 정말 기쁘 고 통쾌하다”고 외치며 만세를 연창했다. 그리곤 곁에 있는 사람에게 담배를 청하여 유유히 피웠다 고 한다. 법정에서 협조하고 도와준 자를 말하라는 물음에 “이완용을 죽이는 것을 찬성한 자는 우리 2천만 동포 모두며 방조자는 전혀 없었다”라고 거침없이 말했다. 그리고 엄숙한 어조로 역적 이완용의 8개 죄목을 낱낱이 들어냈다. 1910년 5월 1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사형을 받았다. 이 자리에서 의사는 “공평치 못한 법률로 나의 생명을 빼앗지만 국가를 위한 나의 충성된 혼과 의로운 혼백은 가히 빼앗지 못한다 할 것이니, 한 번 죽음은 아깝지 아니하거니와 생전에 이룩하지 못한 한을 기어이 설욕 신장하리라”며 조국광복과 민 족독립에 대한 선생의 굳은 신념을 보여줬고 1910년 9월 30일 사형 집행으로 순국하고 말았다. 이때 선생의 나이 불과 24세였다. 이재명 의사의 거터 표지석, 명동성당 근처에 있다.